부왕과의 반목, 형제간의 암투로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 19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며 열국(列國)을 배회하든 공자 중이(훗날의 晋文公)에게 망명생활의 회계를 맡았던 신하 한 놈이 현금은 물론 통장과 심지어 캠핑도구까지 싹 쓸어가는 배신을 때린다. 때 꺼리마저도 없던 어느 날 배가 고파 헛것이 보이며 아사지경에 놓여 있을 때, 개자추(介子推)가 어디서 생겼는지 고깃국 한 그릇을 정성스레 바쳤고, 그 고깃국의 출처를 알 길도 없이 배불리 먹은 중이가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고깃국은 개자추의 허벅지살 이었던 것이다. 넓적다리 살을 베어 임금에게 먹였다는 할고담군(割股啖君 혹자는 할육구주(割肉救主)라고도 한다.)이라는 성어는 이때 생긴 것이다.
한식(寒食)과 개자추의 상관관계를 잘들 아시겠지만, 개자추도 처음부터 면산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모시고 있던 주군이 19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뱃머리에서 그간 주군을 모시고 다니며 갖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문. 무 신하들끼리 논공행상을 미리 점치며 키득거리는 모습에 속물근성을 가진 잡것들 취급을 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는데 막상 논공행상의 자리에서는 자신을 쏙 빼 놓는 것이었다. 결국 홧김에 서방질 한다고, 보따리 싸는 것을 이웃에게 보이며 어미를 들쳐 업고 면산(綿山)으로 갔고, 그 뒷 담화는 독자제위께서 더 잘 아시는 이바구다.
서방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한국인들에게 나타나는 독특한 문화(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 영역에‘개자추(介子推) 콤플렉스(complex)’라는 용어가 있단다. 말인 즉, 누군가에게 섭섭하거나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것을 툭 털어놓고 말하거나 아니면 복수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여 상대방의 자책과 타인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심리를 말함인데, 즉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일종의 자학심리라는 것이다. 웃기는 게 이런 심리적 성향은 오직 동방문화권 특히 유교적 이념이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못난 문화(심리)라는 것이다.
다른 신하들을 이권(논공행상)이나 탐하는 속물근성으로 폄하한 개자추도 막상 그 논공행상에서 빠지자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면산으로 들어가기 전 이웃에게 ‘맛이나 보라’고 떡을 돌리며,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 깊숙이 들어가 ‘나는 자연인이다’외치며 살 것이라고 하직인사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하직인사 떡을 먹은 이웃이 진문공에게 달려가 개자추 소식을 알렸고, 그때서야 개자추 허벅지살 고깃국 먹은 생각이 난 진문공이 그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래서 한식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정치권에 떠도는 무슨‘빠’라는 광신도들을 보면 서방학자들이 우리에게 진단을 내린 독특한 문화(심리) 즉, ‘개자추(介子推) 콤플렉스(complex)’가 아주 적절한 진단이 맞는 것 같다.
얘기가 약간 다른 경우지만, 조선조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을 몰아냈을 때, 이괄(李适)의 공은 1등에 해당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으로 봉해지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지방발령(한직)이 나며 쫓겨나다시피 했다. 이괄은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지만, 사실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파당(派黨: 빠)을 만들어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를 심하게 했고 심지어 무고까지 하였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무고에 의해 특검을 받았으나‘공소권 없음’이라는 무죄처분을 받았으나 반대파는 이번엔 그의 아들을 구속수사하자, 없는 죄를 만들어 치죄하면 자신까지 연좌(당시 시대상으로)될 것을 안 이괄이 난을 일으킨 게 소위 이괄의 난이 준 역사의 교훈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설 때를 상기해 보면‘이괄의 난’과 비슷한 맥락이다. 대통령 만들기에 똑 같이 심혈을 기우렸지만 어떤 놈은‘친박’ 또 어떤 놈은‘비박’으로 선을 긋고 공을 다툰 게 결국 같은 주군에‘진성 빠’와 ‘非빠’가 분리되었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아옹다옹한 게 오늘날 박근혜가 감방에 들어가는 불운으로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교훈이다.
또 근간 정가에서 벌어지고 있는‘드루킹 사태’도 개차추 콤플랙스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처음부터 논공행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재인을 도왔지만 돌아온 떡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원했던 자리보다 한직(閑職)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시도한 것이다.
개자추가 처음부터 명리(名利)를 탐한 것은 아니지만 비난을 받아야 할 사실은‘나 면산으로 가 네~!’라며 홍보를 하고 광고를 한 짓이다. 개자추 스스로 명리를 탐하지 않았다면 면산으로 이사 가는 걸 세상에 왜 떠드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왜 그런 노래 있잖아. 현미의‘떠날 때는 말없이‘하는….이게 정답이다. 정치를 하고 있거나 정치지망생이 한 번쯤 곱씹어 볼만한 역사적 교훈이다. 아니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한 번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