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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동아일보 기사를 검색하다가 아래의 칼럼을 발견합니다. 역사학자 임용한 선생의[임용한의 전쟁史] 중 ‘유비의 죽음’이라는 칼럼입니다. 임용한 선생은 동아일보에 이와 같은 전쟁사를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비의 죽음’이라는 칼럼 전문(全文)을 전제합니다.

 

 

1569년(선조 2년)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조도 삼국지연의를 읽었던 것 같다. 삼국지는 이처럼 조선에서도 광범위한 인기를 얻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조선의 판본이 200여 종이나 된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진법도 언급하고, 기발한 계략도 가득하지만, 전술적인 설명은 아니다. 영화처럼 특정 장면을 잡아 가슴을 뛰게 한다. 그러면 정사 삼국지에는 실제 전투 양상이나 전술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삼국지 마니아가 되면 유명 인물과 전투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로 호기심이 끌리는 경우가 있는데 아쉽게도 정사 삼국지는 이 갈증을 별로 풀어주지 못한다.

 

 

그런 궁금한 전투 중의 하나가 유비의 죽음을 이끈 이릉(夷陵)전투의 진상이다.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응징과 형주 탈환을 목적으로 대군을 동원해 오(吳)나라를 침공했다. 촉한(蜀漢)으로서는 삼국의 균형을 깨고, 삼국 쟁패전에서 역전을 기대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수였다.

 

 

이때 오에서 예상치 못한 천재 육손이 등장해 유비군을 궤멸시킨다. 유비군의 패인은 육군과 수군의 협력 부족. 이로 인한 보급의 애로와 육군의 너무 많고 복잡한 군영 포진 방식이었다고 한다. 위왕 조비는 유비군의 포진을 듣고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유비가 군사를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아니었다. 촉군의 복잡한 구성과 내부 사정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수군을 맡은 황권은 유장의 구신이어서 견제하는 바람에 육군에 과부하가 걸렸다. 아무튼 유비는 나름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군대가 패배하는 원인이 바로 이 나름의 이유이다. 그건 내 사정이지 적의 사정이 아니다. 적은 그 약점을 이용하지 이해하지 않는다.

 

 

안보, 외교, 경영은 항상 적의 입장에서 검토하고 전략에 반영해야지 내 사정만 내세우고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정 중 하나가 정치논리다. 위대한 장군들이 전술이 아니라 정치논리 때문에 패배했다. 그런데 어째 이 실수도 역사에서 무한 반복된다.

 

임용한 역사학자

 

 

저는 삼국지를 70나이 먹도록 30번은 넘게 읽었을 것입니다. 또 삼국지 전집도 78종 장서(藏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삼국지는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삼국지입니다. 이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1권은 너덜거리고 초반 몇 장은 아예 없어져 그냥 머릿속에 그려만 두고 있답니다. 이를테면 삼국지 마니아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역사학자 분이 쓴 명문의 칼럼에 언감생심 반론을 제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가 임용한 선생의‘유비의 죽음‘이라는 명문의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선생 자신이 직접 언급한‘유비군의 패인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학자적 한탄입니다. 삼국지 정사든 소설이든 어떤 기록이 있어야 그것을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겠지만, 학자의 양심과 도리로 상상과 예단을 해가며 글(소설이 아닌 이상)을 쓸 수 없었다는 고백(?)이 오히려 진정한 학자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 학자가 아닌 삼국지를 평생20여 회 이상 읽은 마니아로서, 외람되게도 그 답을 도출해 볼까 합니다.

 

 

칼럼 본문에 언급했지만, “위왕 조비는 유비군의 포진을 듣고‘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을 한 조비도 육도삼략이나 병법에 능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못한 듯합니다.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딱 한마디로‘유비의 죽음’은 일국 최고지도자(유비)의 개인적인 사감(私感)과 분노(忿怒)로 일으킨 전쟁이고 그로 인한 패전이 상심(傷心: 스트레스)을 가져오고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유비의 사감(私感)과 첫 번째 분노는 칼럼에 적시 했듯 관운장의 죽음에 대한 응징입니다. 관운장이 죽은 해는 서기219년(단기2552년, 중국 漢헌제 건안24년, 신라 내해이사금 24년, 고구려 산상왕 23년, 백제 구수왕 6년)입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한 도원결의(桃園結義)가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미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됐으면 그런 사감(私感)정도는 가슴에 묻었어야 합니다. 아우 원수 갚겠다고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지도자의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제군주 시대라지만 그가 제대로 된 지도자였다면 그 순간을 참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다음 장비의 죽음을 살펴봐야 합니다.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 의해 장비가 비명횡사한 해가 서기221년(단기2554년, 중국 유비 촉(蜀)황제 즉위 2년, 신라 내해 이사금26년, 고구려 산상왕25년, 백제 구수왕8년)입니다. 범강과 장달 두 사람은 장비 막하의 장수입니다. 관운장의 원수를 갚겠다며 유비가 전군에 총동원령을 내리자 둘째 형의 죽음으로 비탄과 애통에 빠져있든 장비는, 큰형 유비의 총동원령과 출정을 기다리던 그해6월 범강과 장달에게 전군이 입을 흰 상복과 백기를 사흘 내에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두 사람은 시일이 촉박하여 불가하다며 시간을 좀 더 달라며 항명 아닌 항명을 합니다. 그러나 장비는 두 사람을 명령불복종 죄로 태형50대씩을 때리고, 오히려 기일을 늘여 주기는 고사하고 당장 그 이튿날로 앞당기라는 무리수를 둡니다. 결국 장비의 성깔과 주사를 아는 두 사람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작당하여 술에 곯아떨어진 장비의 목을 몸과 분리시켜 적국 오나라로 튄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유비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큰 아우 원수 갚겠다고 전군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작은 아우의 죽음을 싸움 한 판 벌이기 전, 그것도 하극상에 의해 모가지가 잘리고 그 모가지가 적국으로 갔으니…독자 여러분 입장 같으면 어땠겠습니까? 우리말 중에 이럴 때 표현하는“ 미치고 팔짝 뛰다가 뒤로 넘어진다.”이것 외에 유비의 당시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 하시겠습니까? 전쟁이란 아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해도 그 승패를 모릅니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이성을 잃고 흥분까지 그 전쟁 보나마나 하나마나한 전쟁입니다.

 

 

사실 유비가 총동원령을 내리자 제갈량을 비롯한 조자룡. 황충 등 중신들은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비는 장비에게 그 의사를 묻습니다. 그게 유비가 패하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지요. 자신이 냉정을 잃고 흥분하고 분노한 상태에서 다른 이도 아닌 장비에게 총동원령의 가부(可否)를 묻는다? 아무리 유비지만, 언어도단에 어불성설…훗날 전쟁에 패할 것을 미리 알고 일가족을 죽이고 참전했다는 계백의 심정은 이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이런저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비 스스로 지나치게 오만(傲慢)했던 것입니다.

 

 

작전. 전략 아니면 용력(勇力)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춘 자가 건방지고 오만해도 문제가 될 텐데, 유비 같이 머리(두뇌)도 없고 용력도 없는 인물이 출전을 하며 ‘제갈량’을 촉나라 수도 성도를 방어하라며 남겨 두고 출전하는 등신짓을 합니다. 작전도 전략도 그 무엇도 없는 전쟁을 무슨 수로 치루겠습니까? 오로지 사감과 분노와 오만함….미리 내린 결론이 그러했지만, 유비는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 허탈함이 겹쳐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번민하다가 서기223년(단기2556년, 魏문제 황초4년, 신라 내해이사금28년, 고구려 산상왕27년, 백제 구수왕28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이것이‘유비의 죽음’원인이고 이유입니다.

 

 

많아 장황했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장황하게 쓴 잡썰에 우리의 문재인 대통령을 대입시켜 보면 어떨까요? 그가 지금 거의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팔짝 팔짝 뛰고 있습니다. 저러다 뒤로 넘어져 뇌진탕으로 돌아가실까 걱정입니다. 왜죠? 무엇이? 일본에 무슨 개인적인 사감(私感)이 있는지 모르되, 일본에 개인적 감정을 섞어 분노(忿怒)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자는 겁니까? 무슨 전략. 작전이라도 있는 겁니까? 유비처럼 죽으려고 환장 한 것 아닙니까? 유비와 문재인의 오만한 판단도 그러하지만 유비가 황제에 오른 해가 서기221년이고 죽은 해가 서기223년입니다. 황제에 오르고 햇수로 3년 만 2년 남짓한 시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문재인의 정권찬탈이 2017년 5월이고 금년이 권좌에 앉은 지 햇수로 3년차입니다. 뭔가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쯤에서 썰을 멈추고 잠시 후 샤워를 하고 잠시 외출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 뒤 얘기는 외출을 다녀와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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