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개들의 서훈(敍勳)타령.

 

 

보험이란?

사망(사형). 사고(적화통일). 화재(남북전쟁)등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비하여, 미리 일정한 금액(행동 또는 행위)내고, 사고가 났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일정한 보험금(죽음으로부터 보장)을 주어 혹시 있을 손해(사형. 적화통일. 남북전쟁)를 보상받는 제도를 말함이며 수단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보험이 있다. 보험의 종류는 수 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 예를 들면 고스톱을 칠 때 무리한 고(go)와 역고(逆go)에 따른 반사이익 형의 보험도 있고, 특히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국내에만 있는 반미(反美). 반일(反日) 보험(保險)이라는 신종 보험도 있다. 한마디로 보험 사기극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보험사기가 광야의 들불처럼 번지고 법정전염병인 염병(染病)같이 창궐하지만 종북 좌경 괴뢰정부는 수수방관은커녕 뒷구멍으로 사주하거나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 현장엔 틀림없이 그들이 있다.

과거,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어 열린우리당의 고참(고급)간부가 되어 떵떵거리며 활개 치는 임종석이라는 자가 있지만, 요즘은 감투 이름도 야리꾸리한 얼굴 넙저덕 하고 몸보신 된다면 바퀴벌레도 먹음직하여 얼굴엔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전국 연합 상임의장 오종렬, 명색은 목사라고 하는데 어느 교파 목사인지 영혼과 영생을 위한 설교는 하는지 하다못해 삼시 세 끼 먹을 때 감사기도 정도는 드리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마치 소불알에 수염나듯 듬성듬성 난 수염을 휘날리며 주접을 떨고 있는 통일연대 상임의장 한상렬, 성직자의 본분을 잊거나 발길로 걷어찬 채 진정한 정의(빨갱이 세상?)는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며 기치를 높이든 몇몇의 신부라는, 특히 文가네 신부들은 어떠한 시위 현장에라도 있거나 있었던 것이다. 이자들의 특기는 일상적 민생에 관한 시위현장도 일순간 반미. 반일 시위로 뒤집는 악랄하고 교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는 놈 아무도 없더라.

도대체 반미. 반일시위는 왜 하는 걸까? 미국과 미군이 싫고 일본이 밉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북괴에 동조하는 어쩌면 그들에게 포섭 되었거나 사주 받은 자들로 고정간첩이나 다름 아니며 그들은 북괴체제를 찬양고무하고 김일성 부자를 대 이어 흠모하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찬양하고 흠모하는 북괴가 대한민국이나 민주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 속으로 합류하거나 이주하는 게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하지 않고 오로지 목적은 대한민국의 교란과 반미 반일 운동에 매진(邁進)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자신들이 민주 인사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양두구육(羊頭狗肉)하는 행위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이미 송환 되었거나 아직 송환 되지 아니한 미전향 장기수 또는 자진 월북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인사들은 사상과 이념논쟁을 떠나 존경심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시위 현장이면 어디든 나타나 반미 반일을 일삼거나 주체사상이 이 세상의 어떤 사상과 이념 보다 우월하다고 미쳐 날뛰는 놈들치고 북한 땅에 갔다거나 가서 살고 있다는 놈 아무도 없더라. 놈들은 위의 보험(保險)을 들고 있는 것이다.

 

쾌쾌 묵은 이념논쟁?

결국 오도가도 않는 이런 빨gay들이 미쳐 날뛰며 국기(國基)를 흔들고 국권(國權)을 농락할 때, 이를 근심스러워 하면 어쩐 일인지 김대중 정권을 비롯하여 현 정권의 위정자들은 무슨 말을 못 하게 한다. 국방이나 안보에 관한 어떤 안건이나 걱정스런 얘기만 하려 해도‘또 쾌쾌 묵은 이념논쟁’이냐며 면박을 주고 일찌감치 함구령을 내린다. 과연 쾌쾌 묵은 이념논쟁일까?

 

진부한 얘기지만 우리는 좌우의 대립각이 첨예하게 맞서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다. 숙적 관계에 있던 동서 진영의 화해와는 거리가 먼 우는 우대로 좌는 좌대로 나름의 이데올로기와 이념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어쩌면 영원히 화합 불가한 지상 최대의 비극을 잉태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붉은 무리를 감싸고도는 저들의 저의(底意)는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감히 말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붉은 좌파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망언을 함부로 쏟아 낼 수 있겠는가. 엄연히 좌우가 대립하여 있으니 이념논쟁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는 국가에 대해 우국(憂國)의 심정으로 한마디 하면 쥐 잡듯 주리를 틀고 무슨 죄인인양 여론몰이로 망신을 주고 조리까지 돌리며 대를 이어 김일성부자에게 충성해 보지만 결국 그런 자들의 말로가 순탄했을까?

 

남쪽의 자생적 빨갱이 남로당의 말로.

과거 남한 내에 수 없이 많은 자생적 빨갱이가 있지만 그 대표적 인물들의 말로를 살펴보자.

 

박헌영: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강국: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독일로 유학,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재학 중 프롤레타리아 과학 동맹 등의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귀국 후 이주하(李舟河)등과 원산(元山)에서 좌익 노조를 결성, 활동하다가 1938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15광복 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재개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장, 조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서기장, 1946년 2월 좌익 연합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그해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였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사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인민군야전병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남로당(南勞黨)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55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삼룡:

1939년 박헌영(朴憲永)· 이현상(李鉉相)· 이관술(李觀述)등과 비밀 공산주의 운동단체인‘경성 콤그룹’을 조직하여 조직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제1차 조선공산당의 노선을 계승하여 공장· 지방· 학생층에도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0년 일제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해방 다음 날 출감했다. 당시 광주에 피신해 있던 박헌영은 이순금(李順今:뒤에 김삼룡과 결혼함)을 전주로 보내 연락한 뒤 18일 전주에서 김삼룡을 만나 19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8월21일 옛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조선공산당 재건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9월11일 재건 준비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여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이영(李英)· 정백(鄭伯)· 최창익(崔昌益)등의 옌안파를 흡수하였고 김삼룡은 이현상· 김형선(金炯善)등과 함께 핵심적인조직국간부를맡았다.1946년2월조선공산당을대표하여민족주의민족전선대의원을지냈으며,그해11 월남 조선노동당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9월 미 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박헌영이 월북하자남조선 노동당을 책임지도하다가 1950년 3월27일 서울 아현동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조직원들이 거의 체포된 상태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그의 체포는 사실상 남한에 산재해 있던 남로당의 붕괴를 의미했다. 6·25전쟁 개시 직전 북한은 김삼룡·이주하와 조만식(曺晩植)을 교환하자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6·25전쟁 직후 이주하와 함께 한강 백사장에서 사형 당했다.

 

이주하:

함경남도 북청(北靑)출생으로, 조선공산당서기국원과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을 지낸 좌익 세력의 중심 인물이다. 1913년 원산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하고 3년 뒤 보광학교(保光學校)로 옮겨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발각되어 갑산(甲山)으로 피신하였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정치학과를 다니면서 지방 공산 청년동맹에서 활동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8년 원산 총파업 사건 이후 노동운동조직을 재건하고, 1931년 정재헌(鄭在憲)등과 함께 평양 노동연맹 좌익화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 공산당 원산시 당책임자, 태평양 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지내던 중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년 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7년 원산철도국사건에 연루되어 진남포로 피신하여 숨어 지내다가, 1945년 8·15광복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며 조선 공산당 함경남도 지구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월남하여 박헌영(朴憲永)· 이강국(李康國)등과 함께 재건 조선 공산당 정치국에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 민족 전선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년 12월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에 뽑혔으며, 박헌영이 월북한 뒤 총책을 맡은 김삼룡(金三龍)을 보좌하여 활동하던 중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즉결 처형되었다.

 

이밖에 다수의 남로당 간부 출신이 간첩 행위나 빨갱이 행각을 벌이다 6.25를 기점으로 자진월북 하였으나 계급투쟁에 밀려나 처형당했다고 한다. 작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시위 현장에 성직자라는 미명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정의 무슨 신부라는 사람들과 오종렬. 한상렬 등은 지난 날 자생적 남로당의 계파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중략)

 

사기 보험(保險)에 가입한 회색분자만 있을 뿐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 보면 예나 지금이나 반정부 운동과 반미 반일운동을 하는 자들치고 진짜 빨갱이는 없다. 비단 위에 열거한 자들 뿐 아니라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연예계 종사자들까지도 반미 반일을 획책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저들이 사상과 이념을 제대로 알고 북괴찬양에 동조하며 반미 반일을 부르짖을까? 요즘은 과거와 달리 북괴를 찬양고무하고 김일성 부자를 숭앙했다고 하여 처벌을 받지 않는 모양이다. 요는 밑질 것 없다는 것이다. 저들의 이중적이며 교묘 얍삽한 생각은, 최악의 경우 적화통일이 되었을 때 남쪽 주민의 신분파악 시 밑져도 본전인 반정부와 반미 반일운동의 전력이 있다면 그 세계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보험증권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국 놈들은 애국자도 민족주의자도 평화통일을 하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북한괴뢰로부터 신분을 보장받고 저들의 일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한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 회색분자일 뿐인 것이다.

 

BY ss8000 ON 12. 3, 2018 (신종 보험(保險) 사기에서 일부 발췌)

 

보훈처의 ‘김원봉 토론회’ “北정권 수립에 참여해도 숙청당했다면 서훈해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2/2019040200286.html

 

박헌영, 이강국, 김삼룡, 이주하 등은 자생적 남로당 거두 중의 거두다. 그런데 모조리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김일성에 의해‘사형(死刑)’을 당했다. 그렇다면 빨갱이 짓 하다가 빵에 다녀온 년 놈들도 서훈 정도가 아니라 무궁화 대훈장 감이냐? 야이! 미친 개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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