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附逆)과 피난(避難).

오늘이 동족상잔의 625다. 그로 인해 가신 영령(英靈)들 앞에 잠시 옷깃을 여미고 묵념을 한 뒤 이 아침을 조선 칼럼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본다.

 

[태평로] “6·25 때 느그 아버지는 뭐 하셨노”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3/2019062302070.html

 

칼럼의 말미에…

<<<두 편의 부친 회고를 길게 인용한 까닭은, 편 가르기 이분법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그리고 하나 더. 목청 한번 질러보지 못한 소심한 인생이지만, 이 삶들이야말로 우리 가정과 나라를 지탱해 온 평균적 인생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가난하고 공부도 별로 하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삶. 너는 누구 편이냐 캐묻기보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

 

내 아버지는 나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너희 아버지는 그때 뭐 했냐고 묻던 국회의원을 기억한다. 당연히 부친에 대한 존중과 자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서 오히려 지킬 수 있었던 ‘말없는 아버지’들도 있다. 가족을 버리지 않았고, 자기 자리를 버리지 않았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던 아버지. 훈장이나 보상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더욱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로 매조지 한다.

 

누군가 내게도”6·25 때 느그 아버지는 뭐 하셨노”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까? 당시 우리 아버지는 한강다리가 끊겨 피난을 하지 못하셨다가 1.4후퇴 때에 적의 치하를 벗어났고 세 살 된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서울을 빠져 나와 남으로 남으로 경북 상주까지 갔던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였고 심지어 정전협정이 될 무렵 남북이 국토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보다 극렬(極烈)한 전투를 벌일 때 미군의 B29폭격기나 F86세이버 전투기가 굉음을 울리며 요란스럽게 날아가는 모습에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야~!삐식구다! 야~! 쌕쌕이다!’라며 또래의 아이들과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삐식구’나 ‘쌕쌕이’가 한 번 날아가면 수십 수백이 죽어나가는 참상(慘狀)도 모른 채 말이다.

 

내가 전쟁의 후유증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것은 예닐곱 되어서 일 것이다. 어깨에 간신히 붙은 팔 하나가 덜렁거리는 어머니와 왼 쪽 다리 한 쪽이 없는 형님 그리고 노동력도 별로 없으신 아버지와 가난, 그 와중에도 피난지에서 여동생 둘과 막내 동생 놈을 생산해 내신 아버지의 또 다른 여력(餘力).

 

생각해 보면 북괴군의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넘던 날(628) 한강다리도 폭파 되었고, 결국 피난을 포기했다가 다음 해 1월4일을 기해 피난이 시작 되었으니 일주일 열흘도 아닌 자그마치 반년을 넘게 적의 치하에서 살아있었으니, 당시 아버지의 연세는 30대 중반이셨고 비록 약골의 백면서생일지라도 놈들이 가만두었을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어디에 동원이 되어도 동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부역(附逆)이라는 이름의 주홍 글씨다.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만 그러했을까? 피난을 가지 못한 젊은 남정네들은 모두 그러했을 것이니 그 때를 기해 살아남아 1.4후퇴 피난을 간 모든 인간들은 부역자가 틀림없다. 즉, 적 치하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그 자체가 부역인 것이다.

 

부역이 죄인가? 가장(家長)이 따발총 아래 협박을 받으며 적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게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 그 간난(艱難)의 시절 가장이 부역을 거절하고 완장 찬 남쪽의 자생 빨갱이들의 죽창이나 따발총아래 죽어갔다면 남은 부양식구는 어찌 됐을까?

 

오늘날 새삼 따지고 보면 한강다리가 끊어지기 전 미리 피난을 하고 잽싸게 도망친 자들이 오히려 더 비난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들은 그렇게라도 먼저 빠져나갈 능력. 재력. 정보력이 있을 테니 말이다. 완장 찬 토착 빨갱이 외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서 부역을 일부러 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맥락(脈絡)으로 볼 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독립투사니 상해임시정부니 하며 그들을 영웅시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만주나 상해로 나가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 핍박을 받은 분들이 오히려 애국지사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친일인사라며 주홍 글씨로 낙인(烙印)찍힌 분들 면면을 살펴보면 그 분들이 해외로 중국으로 망명이나 피난 갈 수 있는 여건(與件)이나 능력이 있었다면 그 분들이라고 아니 갔을까? 당신들은 남아서 일본에 부역하며 생명을 유지하려 했을까?

 

일제강점기가 되었든 625가 되었든 적의 치하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부역이 뒤 따랐을 것이다. 해외로의 망명이나 피난을 하지 못해 적과의 동침을 하며 생명을 유지해 온 모든 이들이 부역인 것이다. 고로 부역은 죄가 없고 오히려 약삭빠르게 망명을 하고 피난을 한 인간들이 죄인인 것이다.

 

부록: 6.25 노래 가사 바뀐 것 아십니까?(퍼옴)

■ 가사까지 편집된 “6.25의 노래”…금지곡으로도 모자라■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6.25의 노래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10년간 금지곡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이 노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6.25의 노래’는 지금의 30대 이상이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특히 매년 6월 달이 되면 선생님의 반주 소리에 자주 따라서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이 곡을 《10년간 금지곡》으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그 가사 까지도 아래와 같은 황당한 내용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출처: 이승현, 조갑제닷컴 회원 논객께서 지적해주신 그 내용과 문제점을 아래에 스크랩해 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 시인 ‘별이 되신 님이시여!’ 지은<심재방 시인>이 개사를 맡았다고 합니다.

《新 6.25 노래》 (심재방 지음)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나던 날을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통일의 그 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후렴) 이제야 이루리 그 날의 숙원을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이제야 이루리 한나라 한겨레

 

1절에는 북괴군이 남침했던 내용 대신 남북한이 서로 총칼을 들이대었다는 정황만 설명하고 있다.

 

2절에 가서는 6.25 전쟁의 책임은 북한이 아니라 ‘외세’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외세’란 어디일까?

 

3절은 민족의 공적과 싸워서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이 담았다.

‘민족의 공적’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러한 가사 내용으로 6.25 전쟁을 설명할 수 있을까?

6.25전쟁이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을 왜곡하고 전쟁의 책임이 있는 <김일성에게 면죄부> 를 씌어주는 《‘신 6.25의 노래’》는 역사 속에 사라져야 할 것이다.

 

종북 좌파들의 영악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교조를 통해서 아이 때부터 세뇌를 시키고, 수십년을 불러오며 반공정신을 일깨워준 6.25의 노래조차 이런 식으로 개사를 하면서 역사는 조금 조금씩 왜곡이 되고, 자라나는 세대는 그런 왜곡된 역사로 세뇌가 됩니다. 끔찍합니다!!!

 

참고로 《“6.25의 노래” 원곡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작사 박두진 / 작곡 김동진>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6월 25일 at 6:03 오후

    6,25 때 우리 아부지는 우리 데리고 피난했습니다.
    경북 영덕에서 아버지 고향인 경주로요.
    식구들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것도 잘한것 아닌가요? ㅎㅎ

    오늘 6,25 언급조차 없네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은 이제 우리 같은 나이먹은
    사람들 가슴에만 남아있나 봅니다.

    • ss8000

      2019년 6월 25일 at 6:20 오후

      그냥 분통 터지고 화만 납니다.
      이 놈의 저주 받을 빨개이 삽살개 정권
      언젠간 끝이 날 것이고 부엉이 바위로 오르든
      빵으로 처 박히든 할 날을 손 꼽아 기다려 봅니다.

      일기가 무척 더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건강 유념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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