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꼭 두 주 전인 지난 8/11일 일요일이다. 지상파 TV를 안 본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한가한 날 놓치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이 딱 하나 있다. 바로‘TV쇼 진품명품’이다. 난 이 프로를 즐겨 본다. 물론 그날도 그 프로를 시청하고 있었다. 최근 몇 주 동안은 한일관계 때문인지 주로 독립운동과 관계 된 것들 또는 지사님들의 유물 및 유품 등이 주로 감정꺼리로 올라온다. 물론 이 또한 삽살개 정권의 주구로 전락한 공영TV의 연출이라 생각 같아선 이마저도 티비를 끄거나 채널을 돌리고 싶지만 독립투사님들이야 무슨 죄가 있으리…하는 심정으로 계속 보게 된다.

 

그날도 여전히 우당 이회영 선생의 묵화(친필)와 마지막으로 독립운동가 이규채 선생이 직접 쓴 회고록이 감정을 받으러 올라 왔는데 감정의 백미(白眉)인 마지막 전광판의 숫자가 수십억 이상을 가리키며 끝까지 올라가다가 갑자기 0으로 표시가 된 것이다. 출연진은 물론이거니와 시청을 하던 내 입에서도 아! 하는 탄성(歎聲)이 절로 튀어 나왔다. 감정 당시 분명히 진본이라는 감정위원의 언급이 있었는데 0이라니..의아해 할 수밖에.

 

뒤이어 감정위원의 해설이 뒤 따랐다. 이규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한국독립군 참모장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국내에서는 서예 대중화에도 기여한 인물이며, 1차 쌍성보 전투에 직접 참전했던 인물이고 김구의 백범일지보다 독립운동이 상세히 적혀 있어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의뢰품 이라고 평가한 후 그 가운데 일제에 잡힌 후 재판기록 일부를 소개하기를 “을해년 1935년 (재판 중) 또 묻기를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그들 역시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찌 자녀를 염두에 두겠는가. 많은 말을 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 강산만 돌려주면 그만이다’라는 대목에선 콧날이 시큰한가 하는 순간 내 눈가엔 눈물이 흘러 내렸다.(그러고 보면 내가 아주 토착왜구는 아닌가 보다.ㅠㅠ..)

 

솔직히 그 프로를 시청한 후 순간적인 감정이 일기는 했지만 나만의 기억장치에 보관하거나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그런데 까맣게 잊어버렸던 이규채 선생의 회고록과 그것을 의뢰했던 장본인인 증손자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뜨인다. 가끔씩 독립투사님들의 회고록이나 유품 등이 의뢰에 올라오기는 하지만 여태 단 한 번도 소장자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없기에 너무 의아한 나머지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 일부를 소개해 보면….

 

  1. 이규채 선생의 회고록이 ‘감정가 0원’?

이성우/ 독립운동가 이규채 선생 손자 당연하죠. 감정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이거는 그냥 문화재인 거죠. 한 독립운동가의 기록이에요. 무슨 가격을 매기겠습니까?

 

  1. 독립운동가 집안은 여전히 가난하다?

그런 면이 있죠. 실제 그런 면이 있는데 독립운동을 했다든지 이렇게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멸시되고 어떤 면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핍박받은 거죠. 그래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고 친일 세력들이 창궐하고 있잖아요. 그들이 아주 당당하게 있고!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이규채 선생의 재판기록에서 받았던 그 분에 대한 존경심과 애틋했던 감정들이 분노로 폭발하고 말았다.

 

삼불고(三不顧)라는 말이 있다. 처자불고(妻子不顧), 가사불고(家事不顧), 생명불고(生命不顧)를 말 함이다. 처자와 집안 일 더불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애국을 했던 독립투사들의 생활신조였으니 독립이 된 이후 그 분들 자손이 가진 재산도 없거니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그들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궁핍하고 고달프겠는가. 굳이 자손들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독립운동가 집안은 여전히 가난하다?’라는 질문과 후손의 대답은 독립운동 하신 분들의 생활신조와는 많이 배치되는 부분이다. 누가 등 떠밀어 독립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는 한 분도 없을 것이다. 혹시 있었다면 운동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 배신도 또는 밀정으로 변신한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집안만 여전히 가난했던가? 당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 힘든 시대가 아니었던가? 독립운동가 자손만 배우지 못하고 무식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 후 문맹률은 90퍼센트에 가까웠었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다며 해방이후 높은 관직에 올라 나라를 주물렀던 인물들이 더 많지 않던가? 이규채 선생 같은 경우에도 백범은 앉아서 명령만 하는 위치라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백범 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사료를 남기고도 백범의 자손과 그 자손은? 어떤 식으로 비교를 해야 할까? 더불어 그 자손의 입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핍박받은 거죠’라는 답이 왜 나왔을까? 이규채 선생이 독립 후 빨갱이 운동으로 전환하기라도 하셨던가?

 

‘독립운동가 집안은 여전히 가난하다’라는 얘기는 광복 후부터 나돌기 시작했던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운동가의 생활신조가 삼불고(三不顧)였으니 당연하다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어느 때인가?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어도 몇 억씩 보상을 해 주는 시대다. 유람을 가다가 배가 뒤집혀 사람이 죽어도 몇 억 10억 보상해 주는 시대다. 삽살개 정권 들어 국민소득 1인당 3만 불이라며 자랑을 한 적도 있고 실제 이 나라의 경제력이 세계 10위 안팎이며 평화경제가 완성되면 세계6위도 된다고 설레발치지 않았던가? 이거 저것 다 빼고라도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됐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광복 후 70여 년이 지나도록 독립투사들의 자손들이 아직도 가난에 허덕이게 하는 삽살개 정권이 과연 일본과의 과거사를 함부로 농단할 수 있을까? 다른 정권은 고사하고라도 반일을 해야만 애국자로 신분상승 시켜주는 삽살개 정권이 그 후손들은 왜 방치하는가? 빨갱이 짓을 한 엉뚱한 놈은 훈공서열에 넣지 못해 안달을 해 온 삽살개가 아니던가?

 

정말 웃기는 것은 KBS다. 방송국 아닌가? 그따위 시답잖은 인터뷰로 반일감정을 높일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가난한 독립투사 자손을 도웁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이는 건 어떨까? 개자식들 삽살개의 주구가 되어 앵무새처럼 같은 말 반복하는 나팔 불며 독립투사 후손을 걱정하는 저 파렴치함. 저희더러 직접 도우라고는 않겠다. 오늘이라도 돕기 운동을 벌인다면 미력이나마 협조하겠다.(토착왜구 것은 사절하려나??)

 

문득 백범이 한 말 한 대목이 생각난다.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자유민주주의를 배신하고 빨갱이와 놀아나며 반일운동의 반사이익을 정치자산으로 삼으려는 매국노 변절자를 백번천번 먼저 처단할 것이다.”

 

 

 

 

 

 

1 Comment

  1. 데레사

    2019년 8월 25일 at 11:46 오전

    잘 계셨지요?
    태국으로 이사간 딸네 다녀왔습니다.
    딸도 잘 있고 집도 좋고 다 좋은데 더워서 힘들었습니다.
    이제 비행기타고 외국으로 나가는것도 마지막일것 같습니다.
    이번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러나 그곳에 머무는 12일 동안 우리나라 정치뉴스가 없으니
    속 편하더군요.

    정말 한발의 총알이 있다면…..
    오늘도 건강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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