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山行記)

나이 들어가며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다. 다만 1일 만보 걷기를 목적하고 가급적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침에 눈 뜨자 말자 웨어러블스마트워치를 차고, 산골의 농사철에 바삐 움직이면 오전 안에 훌쩍 만보를 넘고 어쩌다 오후까지 움직이면 2만보도 어렵지 않다. 산골이 한가한 것 같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 일이다 보니 자연적 운동이 된다. 누군가는 그런 움직임을 두고 운동과 노동의 구분방법은 돈을 받고(농사) 움직이는 것은 노동이고 돈을 쓰고 움직이는 게 운동이라지만 어쨌든 운신(運身)을 하고 있으니 운동은 운동이라고 치부(置簿)한다.

 

그러나 농사철이 아닌 요즘 같은 계절엔 집에서 떨어진 면소재지(편도 약 4.5Km)까지 왕복 다녀오면 대충 9km 1만2천보 가량 찍힌다. 그렇게 운동을 해왔는데 서울 집에 머물 때는 마땅히 운동할 길이 없다. 한 때는 집 근처에 있는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을 했지만 사나흘 정도 나가곤 더 이상….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동네의 뒷동산 격인 ‘북한산’ 오르기다. 따라서 서울 집에만 오면 북한산을 매일 오른다고 보면 된다. 보통은 구기분소 쪽으로 올라 승가사를 거쳐 비봉을 다녀오기도 아니면 승가사 석탑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거나 아주 가끔은 대남문을 거쳐 문수봉까지 하는 식으로….거의 매일 오른다.

 

요즘은 날씨가 찬 관계로 주로 승가사 까지만 다녀오고 있다. 승가사를 목적으로 하고 다녀오면 역시 1만2~3천보가 찍힌다. 요즘은 등산객도 없고 산길을 거의 혼자 걷는다. 엊그제는 외진 웅덩이 쪽에 멧돼지가 목욕을 하고 방금 떠난 흔적이 있어 머리끝이 쭈뼛 선다. 뿐만 아니라 승가사 근처엔 무엇을 어떻게 섭취했는지 누른 황구(들개)가 떼 지어 다니기도. 그러나 지은 죄 없으니 마음을 편히 하고 다닌다.

 

며칠 전 공수처법이 통과 되던 날도 승가사를 다녀왔지만, 어떻게 화가 나는지 집에 그냥 있으려니 온 몸에 열불이나 견딜 수가 없다. 다녀와 샤워까지 마치고 속옷도 싹 갈아입었는데 다섯 자 남짓 몸뚱이를 추스를 수가 없어 다시 행장을 하고 북한산을 올랐던 것이다. 두 번 왕복을 하고나니 2만5천여 보. 피곤한 몸으로 장수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서야 약간은 안정이 되었다. 나는 정신이 힘들 땐 오히려 몸을 혹사시키는 버릇 같은 게 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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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역시 북한산을 올랐다. 문제는 출발할 때부터 아랫배가 묵직한 느낌이 온다. 약간 불편했지만 최악의 경우 구기분소에 잘 정리된 화장실도 있으니 급하면…구기분소를 지나며 뱃속을 비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했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그런데 승가사와 대남문 방향 3거리에 도착하자 약간의 이상 증후가 나타난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승가사 입구에 해우소(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지만…)가 있으니 그곳까지 참고 가리라 다짐을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간과한 게 있다. 산길이라는 것을….험악한 산길을 힘쓰고 용을 쓰다 보니 아랫배가 점점 아래로 무거워진다. 장의 활동이 활발해서가 아니고 거의 강제에 의한 축적(蓄積)이다. 승가사 입구 쉼터가 저만큼 보이는데 이르자 더 이상은 괄약근의 한계에 도달 했다. 이런! 우라질! 가는 날이 장날이라든가. 원단(元旦) 휴일이라 평소 보다 등산객이 많다.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지만)평소 같으면 조금만 길(등산로)을 벗어나면 다선 자 남짓한 몸뚱이를 은폐 엄폐할 장소가 있겠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정말 화급하고 죽을 지경이다.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길 없어 객이 뜸한 사이를 뚫고 집채 보다 큰 바위 뒤로 일단 숨은 뒤 눈치를 볼 사이도 없이 엉덩이를 까 붙였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역시 등산객과 길을 살핀 뒤 대한민국에서(그 순간만은 삽살개도 조국이도 문희상도 기타 빨갱이도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가장 만족하고 편한 마음으로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승가사 탑돌이를 마치고 하산을 했다.

 

어제는 아들며느리와 손녀 예솔이가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며 전화가 왔고 시간을 맞추어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산행을 한 것도 그 시간에 맞추어 내려오겠다고 출발한 것이었다. 하산을 하며 시간을 보니 11시 반 경, 20분 내외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곧 도착할 것’이라고 전화를 하려고 뒷주머니에 꽂은 전화를 찾으니(평소엔 전화를 안 가지고 다니지만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온다니…), 어머나! 허전하다. 꽂혀 있어야 할 전화기가 없는 것이다.

 

괄약근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볼 일을 보려는 순간 급하게 바지를 내리는데 뭔가 툭 떨어진다. 전화기다. 얼른 피해를 입지 않을 곳으로 곱게 모셔 놓고 볼 일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게 잘못이다. 주위를 한 번 더 살폈어야 하는 건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야말로 환장하겠는 거다. 말이 뒷동산이지 북한산이 보통 산이던가? 승가사가 아무리 가깝기로 왠만 한 사람은 그곳도 오르기 힘든 험지다. 오죽했으면 잠시라도‘그 놈의 전화기 버릴까?’도 생각 했었다. 그러나….다시 그곳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전회기는 얌전히 그리고 안전하게 제 자리에 있었다.

 

아! 정말 힘든 하루였다. 아이들과 점심을 함께 하지도 못하고….액 땜 했다고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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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늘도 1만 5천보를…오늘도 나와의 약속이 흐뭇하기만 하다.

2 Comments

  1. 데레사

    2020년 1월 3일 at 8:13 오후

    ㅋㅋㅋ
    재미있습니다.
    덕분에 운동한번 잘했구면요.

    • ss8000

      2020년 1월 4일 at 5:59 오전

      무척 격조 했습니다 누님!
      별고 없으시지요?

      운동이요?
      두 번 다신 그 딴 운동 안 하렵니다.
      X쌀뻔한 게 운동이면 평생 운동 않고 살겠습니다. ㅎㅎㅎ..

      새해엔 아프지 마시고 늘 하시던 대로
      주유천하 하시며 좋은 것들 많이 올려 주십시오.

      경자년(제 큰 누나 이름입니다)엔 만사여의(萬事如意)하시고
      보다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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