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기다리며……

관우(關羽) 자(字)는 장생(長生) 이후 고쳐서 운장(雲長)이라고 했다. 하동 해량 사람이다. 유. 관. 장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비롯한 기타의 활약상은 생략하기로 한다. 82근의 청룡도를 휘두를 땐 천하무적이었다. 조조가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당시 모모한 사정으로 관운장은 조조의 휘하에 있었다)고대광실(高大廣室), 금은보화와 쭉쭉빵빵 8등신 미녀는 덤으로 안겨주고 3일소연(小宴) 5일대연(大宴)의 잔치를 베풀어 주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여포로부터 노획한 적토마를 하사하자 그 때 처음으로 봉(鳳)의 수염사이로 하얀 이(치아)를 보이며 웃었단다. 언젠가 조조가 관우를 데리고 조정에 들어갔다. 이에 헌제가 업무를 보다가 관우의 가슴에 달린 주머니(조조는 관우의 수염을 위해 비단주머니를 만들어 줌)를 보고 그게 뭐냐고 묻자, 관우는 그 주머니를 달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주머니를 끌렀다. 그러자 수염이 길게 빠져나와 허리춤까지 닿았다. 그걸 보자 헌제도 기뻐하며“실로 아름다운 수염이다. 그대야말로 미염공(美髥公)이다.”라고 했다. 조조를 섬겼다면 보다 큰 나라에서 얼마든지 출세할 길이 열렸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일편단심으로 도원결의 때 맺은 형님 유비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용맹. 의리 .충신의 표상(表象)이다.

 

문추(文秋) 혹자는 문추(文醜)라고도 한다. 가을 秋를 쓰든 추할 醜를 쓰든 그 놈이 그 놈이다. 생년은 기록되지 않았다. 원소의 최고 장수였다. 용감무쌍했고 전쟁에 임하면 패한 적이 없었다. 그의 동료로 안량(顔良)이라고 있으며“문추와 안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상대 군사들은 벌벌 기었다.

 

헌제(獻帝) 건안 5년 2월 백마 전투에서 안량은 관운장의 청룡도에 목이 떨어진다. 이에 문추는 군사를 이끌고 안량의 복수를 한다며 연진이라는 곳으로 진격하지만 조조 군에 의하여 패하여 달아나자 장료. 서황 등 조조의 상장(上將)들이 추격하자 오히려 문추(文秋)는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에 나섰고 전황이 어지러워지며 조조군은 패하고 만다. 이때 조조가 관운장에게 특청(特請)을 하여 참전을 하고 급기야 문추 또한 청룡도의 이슬이 되고 만다. 그 해가 서기200년, 단기2533년(漢헌제 건안5년, 고구려 산상왕4년, 신라 내해이사금5년, 백제 초고왕35년)4월이다. 즉, 문추(文秋) 또는 문추(文醜)는 4월에 관운장의 청룡도 아래 모가지와 몸뚱이가 분리되는 참사(慘死)를 당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윤석열 총장을 처음 볼 때 얼핏 그에게서‘관운장’을 느꼈다. 옛사람들은 한 풍채 하는 인물을 두고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다고 한다. 관운장이 그랬다. 8척의 몸매에 82근 청룡도를 나무젓가락 휘두르듯 했다. 윤 총장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든가? 그의 걸음걸이는 힘이 있고 씩씩하여 그야말로 보무(步武)가 당당(堂堂)하다. 걸음걸이 마다 얼마나 위용이 있는지 땅이 한 자씩은 패일 것 같은 위엄이 있다.

 

또한 그에게 국민이 쥐어준 검검(檢劍)은 관운장의 82근 청룡도에 필적(匹敵)할만 하다 하겠다. 그는 검검으로 나라를 갉아 처먹는 쥐새끼들은 물론 문재인(文)과 추미애(醜) 즉, 문추(文醜)의 목을 노리고 있다. 관운장의 청룡도에 문추의 모가지가 잘려 나간 것은 서기200년 4월이다. 서슬파란 검검 앞에 문추의 모가지 잘려나갈지 4월을 기대해 보자.

 

사족:

다만 아쉬운 건 윤 총장에게 미염공 같은 수염이 없다는 것이지만, 일설에 의하면 운장이 맥성에서 패주하여 사로잡힐 때 적들의 반마삭(絆馬索)에 거추장스러운 수염이 걸렸다는 얘기도 있는 걸 감안하면 차라리 수염 없는 관운장이 나을 수도 있다. 암튼 관운장의 청룡도에 문추의 모가지가 잘려나갈 4월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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