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 or A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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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도 자금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국민의 살 길은 몸으로 때우는 길밖에 없었다. 문제는 몸으로 때우고 싶어도 그럴만한 공장이나 일자리가 없었다. 그러함에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위해‘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국책(國策)으로 삼고 수출만이 이 나라가 살 길이라며 전 국민에게 호소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웬만한 부자도 재산 1억불(천억 내외)정도는 쉽게 소유하고 있지만 수출의 날이 정해 진 것은 대한민국 국가 수출총액이 1억불 되던 날, 60년대 초의 어느 날이었다. 그 이전 이 땅에서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강원도 태백산(?) 골짜기 동네 상동이라는 곳에서 양질(良質)의 중석(텅스텐)이 유일한 수출품이었을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수출입국이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 건 이후부터 가발. 아티피셜 플라워. 달(doll). 봉제완구 등 그야말로 경공업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할 100% 노동집약 수공업만으로 1억불 금자탑(?) 세운 날, 수출의 날 빵파레가 울렸던 것이다.(지금도 하는가는 모르겠고…)

 

그 빵파레가 울리던 날이 1964년이었다. 그날 잠시 나라가 뒤집힐 정도의 경사를 맞았지만, 언제까지 몸으로만 때워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소원했던 일본과 정식수교를 하며 일제 강점기의 수탈행위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 중공업시대를 연 해가 1년 후인 1965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빨갱이들은 우리의 국부를 이룬 재벌회사를 향해 매판자본(買辦資本)이니 하며 폄하(貶下)도 모자라 소위 귀족노조를 앞세워 친일의 굴레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아! 하다 보니 어째 얘기가 비뚤어지고 있다. 이런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수출입국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국책사업이었고 오늘을 구가(謳歌)하는 모체가 되었지만, 솔직히 한 편으로는 얼마간의 불편함 아니면 부작용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오늘날 지구촌 10위 내외의 부자 나라가 된 것은 순전히 수출입국이라는 국책사업의 성공 결과라는 것을 부인하면 그 놈은 빨갱이가 틀림없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10대 종합상사라는 게 있었다. 매년 수출실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10위까지만‘종합상사’의 지위를 부여 하는 것이다. 삼성. 현대. 대우. 금성. 쌍용. 선경. 코롱. 효성….등등. 나머지 두 상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열거한 종합상사 보다 사세(社勢)가 작거나 아니면 가끔씩 신흥재벌로 등장 했다가 포말(泡沫)처럼 사라졌거나 했을 것이다. 아! 상호(商號)는 기억나지 않지만 ‘신선호’라는 이름의 신흥재벌도 10대 종합상사에 든 적도 있었다.

 

어쨌든 일단 10대 종합상사의 지위에 오르면 여신금리가 일반 대출 금리의 반 또는 반의 반 수준으로 은행돈을 제 호주머니 돈처럼 대출 받을 수 있었다. 가령 일례를 들자면 5~6%금리로 대출을 받아 10~15%의 금리로 중소기업이나 하청업체에 재 대출을 하는 식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오늘의 재벌기업들 중 몇몇은 그런 식으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중소업체를 합병시키며 문어발식으로 사세를 키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지금이야 누구나 안방에 앉아서도 보따리장사(수출. 수입)를 할 수 있지만 당시는 무역업허가증을 받으려면 소위 10대 종합상사 내지 그에 준하는 대기업 또는 대기업에 가까운 중기업 등에만 무역업 허가가 주어졌었다. 가령 소기업이나 영세기업은 보따리장사를 열심히 해서 신용장(L/C)이 내도(來到)해도 수출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수출신용장을 허가증이 있는 회사 명의로 수출할 수밖에, 따라서 얼마간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고, 또 자신의 아이템을 종합상사나 대기업에 판매 의뢰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용장을 취득한 종합상사(대기업)는 그 신용장을 근거로 하여 다시 로컬신용장(Local L/C:내국신용장)을 개설해 주는데 막상 신용장을 수취했어도 운전자금이 없을 경우 5~6%의 금리로 은행에서 대출 받은 것을 10~15%의 높은 이자로 운전자금을 빌려 주며 부를 쌓았던 것이다. 이는 매판자금이 아니라 고금리 돈 장사를 한 것이다. 어쩌면 금산분리(金産分離)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이런 부작용 때문이 아니었을까?

 

좀 웃기는 것은, 매년 연말이 되면 10대 종합상사를 유지하기 위해 신용장 실적을 사러 다니는 웃지 못 할 헤프닝도 있었다. 가령 일정 금액의 수출목표를 달성해야 하는데 그 목표에 미흡하거나 간당거릴 때 총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영세업체나 중소기업에 내도한 신용장을 자신들 회사로 양도(讓渡: 신용장 명의만 빌려주는 것이다.)해 주면 1불당 얼마씩 판매하는 형식이었다. 이런 땐 甲과 乙이 바뀌며 룸싸롱으로 방석집(기생)으로 칙사 대접을 받으며 어깨에 힘 줄 때도 있었다. ㅋㅋ…

 

또 다른 경우도 있었다. 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무수한 굴지의 외국인 상사들이 이 나라에 지사(支社)설립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와는 별도로 외국상사와 국내업체와의 거래나 교류를 도와주는 소위 에이전트(Agent)들이 역시 무수히 많았다. 어떤 경우 이들은 모든 상품(百貨)을 취급하는 또 다른 종합상사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위에서 열거한 모든 잡화를 중개해 주는 업체(이들도 무역업 허가증이 있었다)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개수수료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다.

 

수년 전이든가 아니며 그 이전이든가? 무기중개상의 비리로 한동안 회자 되었던 사건도 있지만, 에이전트들 중에도 악덕 업체가 많았었다. 즉 가격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했고 공장 돌릴 오더가 없는 업체에 아니한 말로 똥값의 수출 대전을 정하는 경우, 동종업체를 따로 불러 경쟁을 시켜 가격인하를 종용하는 경우 심지어 수출을 하고 나면 이런저런 핑계로 대전(代錢)지급을 하지 않고 튀는 경우, 정말 약 오르는 것은 실적은 하나도 없이 금액을 잔뜩 부풀려 곧 오더가 올 것이라며 룸싸롱으로 방석집(기생)으로 칙사 대접을 받는 놈들 등등…..오늘은 이쯤에서 이런 얘기는 접고…..

 

삽살개가 삽살개 식으로 주도해 오던 남북관계가 완전히 냉각상태에 접어들었다. 그것도 아주 초고속 급랭(急冷)상태로 말이다. 나는 어제‘통미봉남(通美封南)과 주북미군(駐北美軍)’이라는 썰을 이곳 게시판에 풀었지만, 놈들이 무슨 연유(緣由)로 삽살개와 죄 없는 우리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일까?

 

한. 미. 북의 운전자론을 돌이켜 보자. 핸들을 잡고 지향점(指向點)도 없이 마구잡이로 액셀을 밟은 것은 외에 삽살개가 이룬 게 뭐지? 자동차는 전진하기 위해 발명한 과학적 문명이기이다. 삽살개는 앞으로 전진한 게 아니라 1910년대 아니면 광복 이전의 시대에서 놀고 자빠진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내가 성질 이빠이 나는데 운전대를 맡기다시피 한 북쪽의 똥돼지가 성질 안 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딱 한 미디로 이 썰을 매조지 하자. 북쪽의 똥돼지는 지금 지금 삽살개라는 지독한 악덕 에이전트에 걸려든 것이다. 놈은 지금 삽살개라는 에이전트를 배제하고 바이어(Buyer)와 직거래(Direct)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삽살개에게 충고 하지만, 정말 평화를 원한다면 북쪽 똥돼지의 바라는 바를 들어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통미봉남(通美封南)과 주북미군(駐北美軍)’을 강력히 주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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