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인(貴人) 5부.

 

 

유비가 대업을 이루려할 때, 그에게는 창칼을 제법 쓰는 관우. 장비. 조자룡 같은 몸통은 있었으나 그 몸통을 유효적절하게 움직일 브레인이 없었다. 어찌어찌 수소문 하여 찾아낸 인재가 요즘으로 치면‘나는 자연인이다’할 수 있는 사마휘(司馬徽)라는 은사(隱士)였다. 유비는 그에게 산에서 내려와 도와주기를 간청하자 일언지하에 이르기를,“산야한산지인불감세용(山野閑散之人不堪世用:산과 들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이 세상에 쓰임을 어찌 감당하리…)이라며 부드럽게 거절하는 대신, 복룡. 봉추 양인득일가안천하(伏龍. 鳳雛, 人得一可安天下:복룡(제갈량).봉추(방통)두 사람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라며 제갈량과 방통을 소개한다.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제갈량은 논외로 하고, 삼국지 정사 촉서(蜀書) 방통전(龐統傳)에 의하면,“선주(先主:유비)가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은 미관말직의 신분으로 형주관내 뇌양현의 현령에 임관되었다. 그러나 방통은 정사를 게을리 하자 면직을 당하였다. 이에 오(吳)나라 장수 노숙(肅)이 선주에게 글을 보내어‘방사원(龐士元:방통의 호)은 겨우 백 리 안팎의 작은 고을이나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보다 큰 벼슬을 내려 중히 쓰셔야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제갈량 역시 유비에게 노숙과 같은 뜻을 아뢰었다. 이에 유비가 그를 큰 그릇으로 여기고 중임(重任)을 하니 마침내 제갈량과 나란히 우대하였다”라고 기술되어있다. 또 그의 모습을 두고 머리가 크고 벗겨졌으며 기괴(奇怪)하게 생겼다고 했으며 유비가 처음 그를 중용하지 않은 것은 그이 기괴한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내가 처가 식솔들에게 이토록 모질 게 당하면서도 공(?)을 들이는 이유가 있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표현할 때 위의 방통(물론 학문이나 지략은 논외로 하고…)에 비기기를 즐겨한다. 신장은 겨우 다섯 자 남짓 머리통만 크고 우락부락 좀은 기괴하게 생겼다. 그런데 지금의 마누라를 처음만나 한 눈에 이성을 잃고 무조건 대시하며 3년여를 따라다녔고 우연한 기회를 얻어 처가에 처음 소개받으러 갔던 날, 장인 영감님의“제 식구 굶어 죽일 상은 아니다”라는 그 말씀 한마디로 승낙하셨을 때 속으로‘백골이 진토 되어도 마누라 향한 일편단심과 처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리라’는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가며 그 맹세가 허물어 질 위기도 있었으나 어쨌든 오늘날까지 굳게 버티며 지켜왔던 것이다. 조금 달리 표현하면 현대판 미녀와 야수라고나 할까? 큭.. 얘기가 약간 빗나갔다.

 

아무튼 난 그날부터 엄 서방 그를 내심 존경심까지 가지며 대하게 되던 어느 날, 며칠 서울 집을 다녀와 필요한 농기구를 찾으러 창고(정부시책으로 마을마다 철골 창고를 지어준 적이 있었다. 그 창고가 개인에게 할양이 되었고 내가 그것을 사들인 것이다)에 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실 말이 창고지 온갖 고물과 폐기물 저장소나 다름 아니다. 난 폐지나 고물을 모아 놓았다가 지나가는 고물장수 아무나 불러 그 폐기물들을 공짜로 가져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몇 년째 모인 폐기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이 말끔히 청소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당시 농사철이 되어 밭갈이와 비닐 멀칭 할 시기였는데 집안의 문전옥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모든 골마다 농사용 비닐이 곱게 쳐져 있었던 것이다.

 

감동. 감명. 말을 하지도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는 눈치껏 그렇게, 마치 내 집을 가꾸고 지켜주는 마당쇠 아니면 집사처럼 가꾸어 주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그는 어찌 했을까?

 

처형이 아무리 죄를 저지르고 꼴 보기 싫고 또 밉기로 같이 사는 엄 서방 때문이라도 더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쪽으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처형과 불목(不睦)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마누라와 함께 면소재지에 있는 맛 집으로 그 둘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며 나는 특별한 제안을 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불목하며 지낼 수는 없다. 이 모든 게 돈이 원수 아니겠는가. 지난 번 나의 제안 300만원을 나는 꼭 받아야겠다. 그러나 그 돈을 갚을 의지가 없어 보이니 방법을 찾자’

 

그리고 내가 제안한 방법은‘엄 서방 당신이 진 빚은 아니지만 당신 마누라가 진 그 빚을 갚기 위해 15일 간 내 집을 위해 일을 해다오. 하루 품삯을 30만원으로 정하되 실제 지급하는 인건비는 10만원으로 하자’는 방법론에 그와 처형은 쾌히 승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있은 다음 날부터 나는 그에게 줄 일거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마누라는 항상 집 뒤 쪽에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고, 가끔 고기도 삶고 진한 국물을 내는 시설(?)이 있었으면 했지만, 워낙 재주가 메주인 나는 가스나 전기로도 충분한데 그 까짓게 왜 필요하냐며 면박만 주어 오던 차였다. 그에게 그 공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살짝 비웃음을 머금을 정도로 자신감을 내 보이며 공사를 하기 시작 했다. 물론 사흘의 말미를 달라며…

 

사흘 후에 과연 지붕까지 씌운 아궁이가 둘인 재래식 부뚜막이 생긴 건 물어보나 마나다. 지금 그곳엔 큰 무쇠 가마솥과 큰 양은 솥 두 개가 걸려 있으며 가끔 마누라의 소원을 활용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집 주위의 조경(造景) 역시 몇 군데 그가 손을 본 후 거짓말 조금 보태면 집이 반짝반짝 빛을 발산할 정도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람의 인성이라는 게 정말 변하기 어려운 건 가 보다. 그가 그동안 내게 갚은 빚은 6일 즉 180만원이다. 아직 120만원(4일)이 남은 시점에 또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공사를 하며 공사에 필요한 재료나 자재는 시내(면)나 제천 시내에서 구입해 쓴다며 처형의 있는 돈으로 먼저 계산 할 테니 그 계좌로 입금시키라고 하기에 그냥 의심 없이 그렇게 해 왔던 것인데, 부뚜막을 끝내고 바닥을 콘크리트 친다며 레미콘 한 트럭이 필요하다기에 그리하라고 했던 것인데 아무리 넉넉히 잡아도 5분의 1도 안 돼는 양을 그 곳에 치는 것까지는, 어차피 남는 것이라 어디 버릴 때도 없고 하여 저희들 집에 쓰겠다고 하기에 그리하라고 했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수년 간 처형과는 앙앙불락했던 관계로 처형 네를 가지 않았다가 그날은 텃밭에서 키운 이런저런 채소를 잔뜩 싣고 마누라와 함께 처형에게 갔다.

 

그런데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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