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악(悖惡)의 시작과 발악(發惡)의 끝

 

 

패악(悖惡)의 시작:

을사사화2년 뒤인 1547년(정미년)에 일어난 사건을 두고‘정미사화’라고 한다. 소윤(小尹)의 우두머리 윤원형세력이 대윤(大尹)의 윤임 일파와 잔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사건이다. 그해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 라는 자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현 서울양재동일대)에서“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국권을 농락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며 나라가 곧 망할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윤원형은 이 사건이 윤임 파에 의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일이라며 그 잔당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하였다. 대로한 윤 대비(문정왕후: 윤원형의 누나)는 여러 선비를 잡아 죽이고 유희춘, 이언적 등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 보내는 등 소위‘정미사화‘를 일으켰으니 이것을 달리‘양재역벽서사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벽서 자체를 윤원형 사주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장희빈의 최후와 발악: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지만,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다시 궁으로 돌아와 숙원(淑媛)으로 책봉된 뒤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뒤이어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의 암투에서 민씨가 폐비되고 자신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은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추미애 헛발질…중앙지검 특활비, 압도적으로 많았다

https://www.chosun.com/national/court_law/2020/11/08/4G66D33JXNAWNMFGB7YVSA3ON4/

 

 

요즘의 추미애를 보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문자가 생각난다. 본시 이 말은‘차차 재미있는 과정으로 변하는…’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여 지지만, 그녀가 벌이는 행각(行脚)을 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지고 분노가 치밀기만 한다. 그러나 냉정을 찾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추미애의 일거수일투족이 反추미애(솔직히 나 같은 경우…)편에겐 환호작약(歡呼雀躍)할 만큼의 자살골을 넣고 있다는 것에 오히려 신바람이 나고 점입가경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추미애의 패악(悖惡)질은 법무장관으로 임명 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윤석열을 몰아내기 위한 이런저런 위증(僞證)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는 마치 지난 날 윤원형세력이 대윤(大尹)의 윤임 일파와 잔당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사건이었던‘정미사화’를 재현(再現)하는 패악(悖惡)시작인 것이다.

 

문제는 秋원형이나 文정왕후가 아무리 개수작을 부려도 지난날처럼 백성들이 속아 주지 않는데 있다. 아무리 증거를 조작해서 윤석열을 겁박(劫迫)하지만 민심은 날이 갈수록 윤석열을 보호하고 옹위하고 있는 것이다.

 

장희빈은 갑술환국(甲戌換局)뒤,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나 희빈으로 강등이 되자 인현황후를 모함해 보지만, 숙종(백성)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표독(慓毒)한 그녀는 모함으로 부족하자 저주(咀呪)를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장희빈의 발악(發惡)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취선당(就善堂)은 자신의 아들인 왕자 윤(昀)의 발복(發福)을 기원하던 곳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곳에 별도의 신당(神堂: 안철수가 새롭게 만들겠다는 당)을 차리고 민비의 화상(畫像)을 그려놓고 그것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쏜다거나, 사람의 뼈를 민비의 처소 툇마루 밑에 묻어두는 등 악행(惡行)과 저주를 거듭한다. 결국 장희빈의 저주와 독수에 걸려든 인현왕후 민비는 승하를 하고 만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만은 않다. 그런 저주와 패악질을 끝까지 지켜 본 이가 바로 훗날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 모든 매체의 민완 기자들)였고, 최씨는 한 때 승하한 민비 처소의 나인이었던 것이다. 지난 날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희빈의 패악질을 숙종(백성)에게 발고(發告)를 했던 것이다.

 

드디어 희빈 秋옥정이 사사(賜死)를 받던 날 秋옥정은 사약을 마시려들지 않는다. 금부도사(윤석열)가 몇 차례인가 빨리 마시라고 독촉을 했지만 오히려 秋옥정은 눙까리에 독을 쓰며 못 마시겠다고 버틴다.

 

결국 호령이 떨어진다.“저년 아가리를 강제로 벌리고 사약을 퍼 넣어라!!” 결국 秋옥정은 한 사발이면 끝날 사약을 두 사발이나 처먹고야 뻗었다. DG는 그 순간까지도 발악을 했던 것이다.

 

약간 각색(脚色)을 했지만 이런 날 반다시 오기를 기대하고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 본다. 끄~읕!

 

 

사족:

하긴 뭐…..

2 Comments

  1. 막일꾼

    2020년 11월 15일 at 6:44 오전

    추옥정이가 결국 사약을 두 사발이나!
    ㅋㅋ
    까불어쌓도 결국 추가나 뭉가나 역사에 루저로 기록될 겁니다!

    • ss8000

      2020년 11월 16일 at 6:02 오전

      당연하신 말씀을
      선배님은 새삼 스럽게 하십니다.
      족 같은 년늠들 뒤끄을 살아 생전 꼭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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