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등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켰다.

 

아프간 난민 약400명이 대한민국에 입국을 했단다. 뭐 엄밀하게 보면 도망쳐 나온 것이다. 물론 그들을 비난하거나 폄하하자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니 이 나라가 그런 불상사가 닥치고 해외로 튀어야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난 그래서 이런데서 글을 올릴 때 정권교체가 안 되면 보트피플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자고 경고성 글을 올리기도 한다. 역지사지, 그래서 절대 그들을 비난하거나 폄하하지도 또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거다. 비단 대한민국으로 도망 온 난민 뿐 아니라 여타의 다른 나라로 도망 간 아프간 난민들은 어쨌든 생명보장도 되고 잘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이제 좀 여유(물심양면)가 생기면 아프간 재탈환(광복)하자며 이런저런 모임도 또 어떤 경우 임시정부도 수립할지 모른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압제를 받을 때처럼.

 

중국에 15년 남짓 상주를 했다. 중국어를 배운 적이 없었기에 첨엔 말이 안 통해, 다행히 한자(漢字)세대였기에 간단한 대화는 필담(筆談)을 주고받으며 소통(?)했지만 한계가 있다. 당연히 우리 민족이라는 조선족을 채용할밖에. 평소 근무지에 있을 경우는 큰 문제가 없는데 타지방 출장이라도 가는 경우 모든 경비가 따불이었다. 항공료. 숙박료. 식비. 기타 부대 경비….

 

중국에 입국한 지 5~6 개월쯤엔 상주하는 지역의 재래시장을 통역은 빼고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달(1년은 안 되고…)후 어느 날 택시를 타고 모처로 가는데 택시기사라는 놈이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가는 것이었다. 성질이 날밖에 “이런! c8!(우리말로..)! 너! 왜! 일루가냐? 나 지금 성질 졸라 났다!”뭐 이러면서 싸우기 시작을 했다. 결국 행로(行路)를 수정하게 하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중국말로 싸우고(?) 승리를 쟁취했다는 사실에 고무되기 시작했다. 내 말이, 외국어를 배우려면 현지에 가서 그쪽 사람들과 직접 부닥치며 배우는 게 최선이라는 거….(사실 여기까지는 오늘의 글제나 목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ㅋㅋㅋ…)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명색 공장이니 조선족 직원이 꽤 여럿 됐다. 그런데 그 조선족 직원들 중에 우리말을 할 때 억양이 딱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이 점 중국에 오래 계신 분들도 잘 모른다. 아니면 신경을 안 썼든가)함경도 억양. 평안도 억양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경상도 억양이다. 그 외 충청도 또는 전라도나 강원도 억양의 조선족은 15여 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한반도를 그려 놓고 중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은 평안도와 함경도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고난을 피해 보겠다고 국경을 넘어 갔을 것이다. 가까울수록 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38선 이남의 지방은 경상도 억양을 쓰는 사람들이 주류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제일 남쪽의 영호남 중에서도 영남 사람들이 주류였는지….겨우 면무식은 했지만 워낙 가방끈이 짧아 그런 통계를 만들 줄도 또 검색해 볼 줄도 모르고 또 그런 통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사해 보면 어떨까? 어째서 경상도 사람들이 유독 많았을까?

 

한 때 중국에 존재하는 조선족을 독립군 또 그 운동을 한 자손들이라고 추겨 세운 적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국적회복을 해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좌경정부 때 그랬던 것으로 기억 된다.

 

나는 달라이라마라는 사람을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치부한다. 중국에서 도망 나와 수십 년을 티벳의 유일한 지도자라며 임시정부 수반으로 군림하며 그가 한 일이 뭐지? 지구촌을 떠돌고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고…. 남는 게 뭐지? 지금 티벳에 남아 있는 그의 동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완전히 한족에 동화 되어 자치구로서 삶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프간에서 탈출하여 세계 뿔뿔이 흩어진 아프간 국민들은 어쨌든 평안히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생지옥 같은 곳에 남아 있는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계속 외신을 타고 우리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티벳이나 아프간에 남아있는 그들의 국민은 동화되거나 순응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가족 또는 친지에게 도망친 사람들 대신 그 행방이나 행위에 대해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망친 사람들 때문에…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 보자. 독립(광복)운동한다며 상해임시정부로 갔다는 지도자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분들 그리고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 기타 일본군이나 외경을 상대로 총을 들거나 육탄으로 싸운 독립군 외에, 이 땅을 탈출하여 독립운동 했다는 사람들의 삶과 생활만 모질고, 이 땅에 남아 억압 받고 공출 당하고 핍박당한 사람들은 편했을까? 생각 같아선 해외로 튄 사람들처럼 갈수만 있었다면 누구라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남아 있고 싶어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상해임시 정부나 유관기관에 거들먹거리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 자금과 경비는 누가 모금하고 송금을 했던가? 그래도 남아 있던 사람들이 보내 주었기에 그 조직을 운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금 이 땅에 국회의원 300명이 있지만 이 중 국가나 국민을 위해 일 하는 년 놈이 몇이나 될까? 그저 파당을 이루고 자리보전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지만 그 모두를 국민의 혈세로 먹여 살리는 것이나 지난 날 임시정부나 무엇이 다를까?

 

해외로 튀어 임시정부의 고관대작이 되어 있다가 광복 후 이 땅으로 돌아 온 위대한 독립투사들의 행태가 어떠했는지 역사에 기록 되어 있다. 대가리 깨지고 코피 터지고 심지어 자리 때문에 살인을 하고. 남아 있던 사람이 그 꼴 보자고 모금하고 송금 했을까? 갈 수 없어 남아 있었다는 죄 때문에 항의나 항변 한 번 못하고 토왜(土倭)로 전락하고 지탄을 받아야할 나머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

 

위안부니 강제노역이지 하지만, 그 양반들 이 땅에 남아 있었기에 그런 핍박 수모를 당한 것이다. 남아 있었다고 편안히 살아 온 게 아니잖아? 해외로 튀어 이런저런 이름의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만 독립군이고 독립운동을 했나? 독립트사들을 폄훼 하자는 거 아니다. 그러나 남아 있었다고 너무 윽박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文비판에… 정철승 “이래서 오래 사는 게 위험”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1/09/01/TK6BNK5JNNGBPM62JVVNRGS42M/?fbclid=IwAR11UHsV2CRoeO5Z728zUJBpSvmySESrH8RNseyHwgL6345W9_EZdseEaXE

 

내가 이 아침 이토록 분개 하는 것은 저GSGG 때문이다. 어디선가 보니 저GSGG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단다. 그 덕분인지 현재 광복회 고문 변호사로 있다는 것이다. 저GSGG가 노 교수님을“이승만 정권때부터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60여 년 동안 정권의 반민주, 반인권을 비판한 적이 없었다”며 맹비난을 했다는 것이다. 참….정말 욕 나온다. 저 놈의 외조부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독립운동을 한 외손자라는 놈이 저 따위 아갈머리를 놀리 게 한, 가정교육이 참 더럽게 된, 독립투사의 집안 새끼는 저런 식으로 막말을 해도 되는지는 묻고 싶다.

 

독립운도 독립투사 너무 생색내지 마라! 고향 선선에 가보면 그래도 등이 휘고 굽은 소나무가 지키더라. 잘 난 소나무는 고향 버리고 다 떠나고, 못난 소나무가 지킨 걸 왜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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