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5,000m와10,000m중거리육상선수로,
이종목에서는다른이들의추종을불허하는빼어난성적을올리고있던선수였었다고합니다.
그러나,당시의일본육상연맹은
자국에서의1964년도오쿄올림픽개최를7개월앞두고,급거그를’마라톤대표선수’로도선발합니다.
-‘중거리’도결코짧지않은거리이지만,’마라톤코스약42Km’와는조건이많이구별됩니다.
*
1960년대는일본의’1인당GDP’가<2,000달러~6,000달러대>로,(일본GDP통계(2/6)에서)
앞서,패전,미국의신탁통치를경험했던일본이
정신적으로도물질적으로도여전히빈곤했던시대의이야기였습니다.
그런곳에서도당시,올림픽대표선수의강화훈련을맡았던훈련지는
‘전범국일본’에게허락된군대’자위대(自衛隊)내체육학교’.
-운동능력이특출한소수정예의일본선수들은’나라의명예를높이는<임무>’를품고훈련을받아…
그리고,이쯔부라야선수도
–종목의변경에도불구하고–,일본이토오쿄올림픽을기념하여세운’국립경기장’을메운6만명의관중들앞,
그트랙위에모습을드러냅니다.
앞선1960년로마올림픽대회에서’맨발의런너’로금메달을차지하여유명한
에티오피아육상선수아베베(1932-78)의뒤를좇아2번째로의등장.
그러나,본디중거리선수로,자신의부친의충고<앞만보고달릴것>에충실했다는우직한그는
고울을눈앞에두고뒷선수에게자리를빼앗깁니다.
-7개월전까지길어도10Km를달리던그가,장거리마라톤선수들의’마지막분투’를이해하지못했을지도…
다만,그의동메달은당시일본이국립경기장트랙에서받은육상계유일의메달로,
급격히’신인마라토너’로변신하며올린성과에
당시의빈곤했던일본인들이그를<국민선수>로부르게된것은물론이었습니다.
그럼에도,뒤를좇아오던영국선수의분투에무릎을끓은결과에
그는그트랙위에서,<4년후의멕시코시티올림픽에서는반드시금메달을따겠다>고선언합니다…
-이미그의몸,특히육상선수에게는더없이중요한발목의아킬레스건과허리가
과격한분발로하여만신창이(萬身瘡痍)가되어있었음에도…
*
4년은길기도,한편짧기도한시간…
이후,’금메달에의재도전’을기약했던쯔부라야선수는
20,000m종목으로거리를늘리면서역시마라토너로서의노력을기울입니다.
그리고,약속했던멕시코시티올림픽이개최되는1968년의신년이밝고…
설날이라하여오래간만에귀향한그를
온가족–아버님어머님,많은형제,그리고형제와같았던사람들–은진심으로응원하는마음으로,
-신체내장의활동을돕고,자양강장(滋養强壯)몸에영양을주어튼튼하게한다는특별한음식’토로로밥’,
-산촌에서는귀품인’스시’,민간요법중신뢰되는약초를넣어지은’시소잎밥’,
-겨울에는귀한야채과일로만든진수성찬에영양술…
등등…,가지각색의음식을장만하여먹입니다…
…그들의마음을너무나잘알며음식을입에넣는쯔부라야선수는,
언제나’정말맛있습니다(美味しうございます。)’며,깊이깊이머리를숙였을터입니다….
그리고,절절한사랑과기대로배웅하는그많은가족들을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