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왼쪽)… (2013년 8월, 오른쪽)
같은 인물. 그리고 그 사이, 11개월…
1955년생이라고 하니, 현재 61~62세.
그간 약 780개월을 살아온 중, 이 ‘불과 11개월’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국에서는 ‘성형’을 「가진 자의 ‘훈장’」으로 여기는 듯 하나,
정말은 「내면의 ‘결핍감, 동요와 불안’」이 치닫게 하는 ‘충동성 가식’.
(진정 ‘가진’ 사람은 ‘자기부정’은 하지 않아…)
–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서, ‘그 가슴’은 텅빈 것이 되었을까? – 결과, 성형에 선풍기얼굴…
‘단아했던 여인’의 모습에서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진주두른 돼지’를 연상시킬 듯한 이 변모에 나는 그저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변신한 그녀는,
그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거지근성’ ‘시체장사’ 등 희생자와 유가족에 막말」을 했다고…
(이후에, “이 메시지에 유가족을 폄훼하는 모욕 내용이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해명하나,
이런 멧시지를 옮기는 데에는 그런 류의 생각을 했었기 때문. – 자기 생각의 ‘근거, 그 실증’으로 이용.
마치, 내게 이 여인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있어, 이 여인의 ‘사진’을 이렇게 옮기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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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른 등’
WeBlog를 준비해준 chosun.com에 감사한다.
그 보답으로, 한정된 지면으로해서 「세상의 중요한 일들을 다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진 chosun.com을 위해
그들이 「보도・게재하지 못하는 세상의 일면」을 소개하는 블러그가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
(윗 사진의 기사는, 오늘 2016년 3월 22일, Daum, Naver, 하물며 언론중앙까지도 일제 보도한 것으로
chosun.com에서는 읽을 수 없었기에, 일조하여 올린다.)
*
그는, 살아 있음에도 시체와 같아서,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옷깃을 움켜쥔) 내 손은, 마치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는 듯’ 했다.
…Living as he did, like a corpse, he couldn’t be sure of being alive.
It might look as if my hands were empty…”
(우리말 옮김: 성학)
1942년,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1913-60)가 쓴
소설 <이방인, 異邦人(The Outsider)>중 종결부의 귀절.
*
(중략) 하지만, 보라!
‘약 75년전’, 작가 까뮈는 위의 인용을 통해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도
<‘숨은 쉬고 있어도, 시체처럼 죽은 자‘의 모습으로 –자기존재를 주장하지도 않으며– 즉, ‘기고 있다’>고 적고 있지 않은가!
유독 ‘자신의 주인공만’이 그런 ‘다수들’과 달랐기에
작가가 그에게 헌상한 이름이 <이방인, The Outsider>일 정도로~!
그리고, 그러했던 프랑스인들이 그 후 지난 수십년 동안
<–기지 않아도, 굽히지 않아도–, 꿋꿋이 ‘제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인간존엄이 보장되는’ 인간관계, 사회제도>를 모색하며
‘끊임없는 논쟁’과 ‘수없이 많은 수정’을 거듭하면서 이룬 ‘오늘날의 프랑스’속에서
그들은「 ‘등을 곧게’ 펴고 사는 것」일 뿐…
위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든, 한 눈에 가장 먼저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보여지는 것은
— 모든 ‘감각정보’가 집중되어 ‘뇌’로 전해지는– ‘척추뼈, 그 뒷 자태’이지 않을까 싶다.
– 아직은 ‘한 사람’으로 불려질 수 없는 아기나, 오랜 삶의 경륜으로 소모하신 노인들은 별개로,
이 「등에 힘을 넣어 ‘곧바로’ 세우는 힘」이야말로 「인간력의 표출」.
나는, 「공식일정도 갖지 않은 날, 승강구의 일반객들을 제지시키며 플랫홈을 질주한 이 ‘시대를 모르는 대감님’」앞에
내 등을 ‘똑바로 세우고’ 선다. – 인간이기에 .
[출처] 한국인들은 ‘서양인들’보다 열등한가??|작성자 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