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창

2005-10-07 12:44:36

브람스처럼 차이코프스키도 연상의 여인인 부유한 미망인 폰메크 부인을 연모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13년간 1200통의 편지가 오갔답니다.
프라토닉러브를 한 것 이지요.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희망 이였던 폰메크 부인으로 부터 일방적인 단교를 당한 뒤
치유 불가능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고 작곡한 곡이 교향곡 6번 비창입니다.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할 만큼 레퀴엠에 가까운 분위깁니다.
초연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고 상트 페테르브르크에 콜레라가 창궐하는 시점에
차이코프스키는 끓이지도 않은 네바강의 강물을 들이키고
콜레라에 걸려서 비창을 초연한지 6 일 만에 사망했습니다.
우울에 점령당한 영혼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천재성을 타고난 음악가였지만 조화롭지 못한 삶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결국 차이코프스키의 말대로 "비창 교향곡"은 그 자신의 진혼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비창 연주회 때 일입니다.
3악장에 모든 악기들이 동원되어 서서히 비바체로 연주하고
요란스럽게 끝나는 바람에 청중이 종장인줄 알고 박수를 치게 되었습니다.
비창을 듣다가 이 대목에서 항상 깜빡 속기 십상인데 수준 높은 청중들도
여지없이 걸려들더군요.
박수를 무시하고 바로 4악장이 이어지고 콘트라베이스의 흐느낌 뒤에 고음 악기들이
화답을 하며 천국 문에 이른 것을 암시하는 듯 하는 음악에 젖어 들다보면
어디론가 끝없이 끌려가는 듯 빠지게 됩니다.
이윽고 4악장이 끝났지만 관객 중 아무도 박수를 치는 사람도 없고
지휘자도 꼼짝을 안하고 굳은 듯 서있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지휘자가 움직이고 그때서야 관객들이 박수를 칩니다.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안나 까레리나"가 생각나는 분 계실 겁니다.
안나가 기차역에서 브론스키 백작과 만나는 장면에서 흐르던 1악장의 주제 선율.
눈발이 휘날리는 황량한 러시아의 기차역에서 갑자기 브론스키 백작과 마주친
안나의 얼굴에 얼핏 스치는 불길한 예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갈등하는 안나의 고혹적인 아름다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배경으로 깔리던 비창 교향곡의 선율이 너무나 인상적이지요.

"비창"하면 단순히 슬픈 감정을 넘어선 그 무엇이 느껴지지요.
그것은 비장한 슬픔이요,
처연한 슬픔입니다.
그저 감정의 표피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슬픔의 심연을 파고들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슬픔을 처연하고 아름답게 느끼게 합니다.
"비창 교향곡" 을 들으면 슬픔이라는 정서를 이토록 깊은 울림으로 그려낸
차이코프스키의 예술과 천재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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