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in Concerto D Major OP. 61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 major op.61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 Kyung Wha Chung, Violin
– Kirill Kondrashin
– Wiener Philharmoniker
제3악장 론도 알레그로
정경화 鄭京和 1948∼ 바이올리니스트 서울 출생.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음악학교에서 I. 갈라미안에게 배웠다. 1967년 레벤트리트 기념 콩쿠르에서 동문인 P. 주커만과 함께 1위를 하고 68년 뉴욕, 70년 런던에서 데뷔에 성공을 거두어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열정으로 긴장감이 감도는 연주를 하여 세계 각지의 청중을 매료하고 있다. 첼리스트인 언니 명화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동생 명훈과 함께 피아노 3중주단(정트리오)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활은 그저 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녀를 만나는 순간 마술이 되었다. "자, 나는 이 부분을 이가 시리도록 춥게 연주할 거예요. 여러분은 그보다 좀더 넉넉하게, 보듬듯이 따라오면 돼요" 정경화 뉴욕에서 공부한지 6년째(19세)인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쿨에서 공동 우승한 이래, ‘조국 근대화’의 길에 내몰려 팍팍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는 빛이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은 아직 도저히 안 된다며 출전을 고사했던 터라 당시 기억은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결정적 계기는 콩쿨 우승 덕에 따낸 1970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유럽 데뷔 무대였다. 대가 이츠하크 펄먼이 개인적 사정으로 협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막 이름을 얻기 시작한 그에게 대신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공연 예술 특유의 관행 덕택에 그는 동양의 낯선 소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세계의 대도시를 찾아 다니며 경력과 명성을 쌓아갔다. 일본 등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했고 세계적 음반사인 데카에서 녹음 제의가 들어왔다. 런던 데뷔 무대에서 협연했던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다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발표한 음반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적 메이저 음반사와 손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그는 거침 없는 몸놀림과 강렬한 해석으로 전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깊이 각인돼 왔다. 마력의 활놀림은 곧 바로 음반사의 주목을 받게 돼 일련의 대편성 협주곡 음반들이 줄을 이었다. 1973년의 월튼과 스트라빈스키 협주곡 음반은 에디슨상을 따냈다. 1974년에는 전설의 거장 게오르크 솔티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녹음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그를 일약 대가의 반열에 끌어 올렸다.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당시 서구 사회에서 막 태동하던 여성해방운동과도 잘 부합됐다.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가 내뿜는 강렬한 개성은 단번에 서양인들을 사로잡았다. 왜 그랬을까? “여자가 내는 소리란 작다는 편견이 싫어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려 무척 노력했다”고 그는 답한다. 약소국으로부터 온 작은 소녀의 음악이라는 고정 관념은 엄청난 심적 부담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특유의 완벽주의까지 중첩, 덕분에 그가 만든 음반은 별 다섯개가 모자랐다. 인기 소품인 엘가의 ‘사랑의 인사’ 같은 경우 그 곡의 연주에 필요한 기교를 터득하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으나 녹음에는 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2,30대 그의 완벽주의는 거의 강박적이었다. 음악의 해석을 두고 자기 주장을 전면에 내세워 주도권을 가지려 했기 때문에 지휘자들과 치러야 했던 마찰은 유명하다. 특히 하이팅크처럼 카리스마를 갖고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지휘자들조차 동양의 마녀에게 길을 터주어야 했다. “내 입맛에 안 맞으면 조금도 안 했죠.”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연주자라며 내로라 하는 매니지먼트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변덕스런 공연계의 생태를 몸으로 익힌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 매니지먼트사 ICM의 데이비드 포스터 사장과 일체의 공연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온화함은 가정이 가져다준 선물 가정을 갖기 전까지 그의 연주는 털끝만큼의 빈틈도 용납 않았다.
무대 위 공간이 좁아라 지독스레 움직이며 연주하는 그는 무대에서는 신기(神氣)마저 느껴졌다. 변화의 조짐은 198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힘이 넘치고 격정적이기까지 하던 연주가 온화ㆍ유쾌한 것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가정이라는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세계를 주름잡던 여인이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둘째를 낳고 바이올린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히 고민에 빠져야 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연주자로서는 아무 생각 않고 커리어만 쌓아가야 했던 이 시절을 그는 가장 힘들었던 고비로 꼽는다. 그의 역경에는 신비주의적 이해가 필요한 면이 없지도 않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시절, 1989년 은혜를 받았어요. 예술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에 고루 충실할 수 없다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때 였죠.” 원래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지만 부친의 사망을 당하고 보니 영적 문제는 각별한 무게로 그를 채근했다. 1999년 귀국 독주회 때 수익금 전액을 교회에 기부했던 일은 문화계의 화제였다. 그가 크리스천이란 사실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던 일이기도 했다. 유진 박을 극구 칭찬하는 대목에선 분명 달라진 면모가 느껴진다. 1998년 뉴욕 연주회 때였다. “처음 듣는 자리였지만 기막혔죠. 그냥 연주자가 아니라 대단한 창조성이 느껴졌어요. 그 재주가 도태되지 않기를 바래요.” 재즈건 국악이건 한 데 녹여 버리는 무서운 후배를 알아보는 눈을 지닌 그는 그러나 자신은 자기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다. “아직도 바흐 프로젝트는 미완”이라며 “앞으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6곡)에 도전하겠다”고 밝히는 그는 자신의 몫을 알고 있는 듯하다. 구성과 특징 제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d장조 4분의4박자 소나타형식 갑자기 팀파니가 P로서 시작되며 이러한 시작은 지금까지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리듬인데, 이 리듬은 전 악장을 통해서 중요하게 연주되고 있다. 제 2소절부터 목관이 제 1주제를 제시하고 이 주제는 선율적이어 부드러우며 평화롭고 웅대한 맬로디 입니다. 제 2주제도 목관으로 제시되며 간단하면서도 친밀한 멜로디인데 현악기군에 넘겨져 되풀이 됩니다. 다시 경과부를 거쳐 특징있는 코다의 주제가 제 1바이얼린으로 여리게 나타나 관현악만에 의한 연주로 전주부분을 마치게 됩니다. 재현부는 ff로서 제 1주제부가 다시 연주된 다음 독주 바이얼린이 눈부시게 연주되며 제 2주제가 제연됩니다. 그후 카덴짜가 시작되며 그 뒤 독주 바이얼린은 제 2주제를 부드럽게 노래하기 시작하나 점점 여려져서 pp까지 되어 이윽고 크리센도 되어 ff로서 힘차게 주화음을 전합주로 연주하고 끝마칩니다. 제2악장 라르게토(Larghetto) G장조 4분의4박자 변주곡형식 유연한 가요 가락의 악장 , 현악합주의 부드러운 울림 사이로 바이올린의 아름다운선율이 흐른다. 숭고한 신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 숭고한 감명을 받게됩니다. 아름다운 주제가 pp로서 mute를 사용한 현악기군만으로 제시되며 안식에 넘치는 아름다운 선율입니다. 제 1변주에서는 클라리넷이 주제를 연주하며 독주 바이얼린이 장식적으로 그 사이를 누비며 흐릅니다. 제 2변주에서는 주제의 선율이 파곳으로 연주되며 이것은 극히 드문 예이며, 독주 바이얼린이 장식적으로 그 사이를 누비며 흐릅니다. 제 3변주는 독주 바이얼린을 제외한 관현악만의 f로 연주됩니다. 그 뒤 독주 바이얼린이 카덴짜 풍으로 높고 낮게 춤추듯이 새로운 맬로디를 칸타빌레로서 연주합니다. 그리하여 화려한 변주 부분이 있은뒤 지금의 새로운 맬로디로 새롭게 단장되어 이윽고 여려져 pp가 되어 꺼질듯이 사라집니다. 제3악장 론도 알레그로 D장조 8분의6박자 론도형식 바이올린이 G 선으로 론도 주제를 제시, 끈덕진 느낌을 주는 인상적인 선율입니다. 페르마타가 있은 뒤 독주 바이얼린은 높이 올라 두 옥타브 위에서 같은 주제의 반복합니다. 또 페르마타가 있은 뒤 독주 바이얼린을 제외한 관현악의 전합주로 ff에서 이 주제가 힘차게 되풀이 됩니다. 그 뒤 독주 바이얼린이 sf로서 부주제의 맨처음 것을 유도해 가는데 이것 역시 인상적인 선율입니다. 그 뒤 다시 독주 바이얼린의 론도 주제가 두 옥타브 위에서 되풀이 된 다음 관현악의 전합주로 론도 주제가 재연되다가 다시 독주 바이얼린에 의한 부주제가 처음 것으로 되풀이 됩니다. 눈부신 기교를 보이며 드디어 마지막 솜씨를 보이는 카덴짜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끝나면 론도 주제의 주요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늠름하고 힘찬 론도가 계속 되며 , 멋진 기교와 함께 찬란한 클라이 막스에 이른다. 작품배경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1806년(36세)은 그의 중기의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 해당되는 해로 왕성한 창작의 해였다. 교향곡 제4번과 피아노협주곡 제4번이 모두 이 해에 완성되었다. 같은 해 작곡한 피아노협주곡과는 달리 바이올린협주곡은 기품있고 절제되어 있다. 이 곡에서 베토벤의 하늘을 찌를 듯 한 격렬한 기백 같은 것을 절감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그의 전성 시기에 작곡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베토벤 역시 결국은 바이올린협주곡을 한 곡 밖에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이 곡은 베토벤 바이올린 음악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설사 이 곡 밖에 작곡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이올린 음악사상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이 곡의 카덴자는 베토벤 자신이 써넣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첨가하여 연주해 주고 있다. 많이도 들었던 곡이다. 그만큼 바이올린협주곡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큼 아름다운 서정과 웅대한 스케일이 느껴지는 곡이다. 안네소피 무터가 예쁘게 우아하게 연주하는 데 비해 같은 여성인 정경화의 연주는 냉정함과 강인함이 함께 겸비되어 하이페츠와 무터의 장점의 중간 쯤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Kirill KONDRASHIN
콘드라신은 1914년 3월 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비올라를 하는 아버지와 바이올린을 하는 어머니를 부모로 둔 음악가 집안에서 6세 때 피아노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지만 크게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러던중 14세 때 오케스트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시 음악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콘드라신은 193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당시 음악계의 대가인 Boris Khaikin에게 사사받는다. 이후 1936-1943년 레닌그라드의 Maly 가극장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43년 스승인 Khaikin의 영향과 쇼스타코비치의 추천으로 볼쇼이 가각장의 종신 지휘자를 맡게 되었다.
콘드라신은 1956년 오페라 지휘를 그만 둘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관심을 관현악곡으로 바꾸게 되었다.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지휘자로 취임하여 1975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한편 1958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과 함께 미국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였고, 소련인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하여 백악관에 초대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콘드라신은 소련 음악을 서방에 알리는데도 힘을 썼으며 쇼스타코비치와 의 친분으로 그의 교향곡 4, 12, 13번 초연을 맡기도 하였다.
1978년 정치적 신념 하에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968년 이래로 같이 활동을 한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종신 수석 지휘자를 하이팅크와 같이 맡게 되었다.
1981년 3월 7일 자신의 생일날 함부르크의 NDR 심포니기 암스테르담 순회 연주시 이 악단과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하였는데 그 연주회가 끝내고 밤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때의 3월 7일 연주는 당시 청중들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의 연주회였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날의 연주가 음반으로 이미 발매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