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감 2강 : 여인의 사랑과 생애_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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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공감 2강 : 여인의 사랑과 생애_슈만
1번_그를 처음 만난 후
2번_모든 이 중에 가장 빛나는 그
3번_나는 그를 잡지 못했네.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네
4번_내 손가락에 걸린 그대의 반지
5번_형제들이여, 나를 도와주세요
6번_상냥한 친구들이여
7번_내 마음에, 내 가슴에
8번_그대가 처음으로 내게 고통을 안겨주었네. 오로지 그가 첫번째 상처였다
* 호두나무
* 연꽃
* 그대는 한 송이 꽃과 같이
* 푸른 싹
* 고독한 눈물
* 헌정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로베르트 슈만은
독일 사람으로 1810년 태어나 1856년, 46세에 본 근처에서 죽었다.
슈만은 일생 동안 음악만큼이나 문학에 심취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에 묻혀 살았다.
아버지는 책을 팔고 또 출판하는 사람이었다.
14 세 때 그는 아버지가 출판하던 책에 원고를 발표했다. 그리고 17세 때는 시를 썼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열광케 한 것, 그를 말 그대로 미치게 만든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다.
일곱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얼마 후 작곡에도 손을 댔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작곡이 썩 괜찮은 직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 아버지가 죽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는 슈만이 음악 하는 것을 더 불안해했다.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법대생이었다.
법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라이프치히로 온 지 몇 주 안 되어 그는 피아노 선생을 찾아냈다.
그리고 연습에만 매달렸다.
그 선생 댁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그녀 이름은 클라라.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이미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은 같이 피아노를 배우는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었다.
그의 초기 피아노 명곡인 ‘교향적 연습곡’, ‘카니발’ 등은 그녀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하지만 슈만은, 14세 연상의 클라라와 훨씬 더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남녀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가 음악 자체로 펼쳐지게 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는 슈만의 제자인 브람스와 아름다운 사랑과
존경의 생애를 함께 하게 된다.
클라라는 음악사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 중 하나이다.
1892년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곳 법대 교수가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것.
1830년에 이르면 어머니도 슈만의 음악을 향한 집념에 두 손을 들게 된다.
슈만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클라라 집에서 한집안 식구 처럼 살았다.
숱한 음악을 작곡했고 소설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여 유명한 연주자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이자 다행인 사건이 일어났다.
1833년 그는 손가락 힘을 강하게 해 주게끔 자신이 고안한 연습 기계를 직접 실험해 보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의 길이 끊기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4년부터 그는 <새음악 잡지>라는 이름의 잡지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썼다.
뒷날 이 잡지에 특히 그는 브람스를 소개했다.
이름이 아직도 낯선 청년 음악가 브람스를 그는 ‘베토벤의 위대한 독일 음악 전통을 이을 대가’
라고 소개했다. 과연 브람스는 슈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슈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슈만이 빈을 방문하여 슈베르트의 ‘위대한 C장조 교향곡’을 발견하여
멘델스존에게 건네 준 것은 1838년이다.
잡지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갔다.
이 시기에 그는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 놀라운 것은, 눈여겨보니 클라라도 자신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딸이 철딱서니 없어 보였다.
유명 피아니스트로 키웠는데 기껏 땡전 한푼 없는 건달 작곡가 지망생과 결혼하겠다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보기에 슈만은 은혜를 모르는 놈이었다. 가르쳐주고 먹여 주었더니 철모르는 내 딸 을
꼬드기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싸움이 길고 지리하게, 또 추잡하게 이어졌다. 싸움은 법정으로 비화했다.
스승은 제자를 미성년자 유괴죄로 고발했다.
1840년이 되어서야 둘은 겨우 결혼 승낙을 얻었다.
빈의 한 악기사에서 피아노를 한 대 결혼 선물로 주었다.
이 피아노는 클라라가 내내 쓰다가, 그녀가 죽은 후에는 브람스가 쓰게 되었다.
둘의 결혼 생활은 그지없이 행복했다. 결혼 전에도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사랑은
숱한 작품들, 특히 피아노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클라라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들이 홍수처럼 넘쳐 났다.
두 개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는
그의 대표적인 연가곡집 등 한평생 작곡한 2백 50여 곡 중 절반이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다.
극심한 우울증이 슈만을 사로잡는일이 잦아졌다.
1854년 2월부터 그는 환청을 듣기 시작 했다.
헛소리는 때론 감미로운 음악으로, 때론 죽이겠다는 위협 소리로 들렸다.
마침내 그는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 자살 기도였다.
다행히 지나가는 배가 그를 건져 내 목숨을 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 병원으로 실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걸작은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슈만은 자신의 가장 친밀하고 직접적인 감정들을 피아노 독주곡들을 통해 표현했다.
그 대부분은 물론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슈만이 어두운 내면의 고통을 예술로 빚어 낸 것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그 고통이 견딜 만하고, 급기야 소중해지게끔 되는 그런 열매였던 것이다.
★단 하나의 사랑 클라라
한 여인을 사랑한 예술가 요하네스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너무도 열정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랑을 평생 갈구하였으며
사랑을 지켜나간 너무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특히 그의 사랑 중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은 그의 예술가적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게 한 사랑으로 그가 클라라를 만난 순간이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수만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브람스가 함부르그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고,
브람스는 그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요하임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으나
그 후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슈만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용기를 내어
그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오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그 후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하루도 그의 작품에 관한 찬사가 없는 날이 없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시 피아니스트로서 서른 네 살이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만 그의 온 정열을 쏟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다시금 진정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전환기를 가지게 된다.
우정과 존경은 사랑으로 변하고
1853년 슈만이 정신병이 악화되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1854년 3월 4일 슈만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작품8)을 들려주고 이윽고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작품9)을 작곡했다.
이 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우정과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불타는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편지를 통해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상기시켰고 자신은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클라라 역시 브람스와의 관계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많은 기쁨을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람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의 영혼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와 자신이 음악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은인이요 친구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충실해야겠다는 소망 사이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폭풍과 같은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
당시 착상한 광포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하고 있다.
"자, 이제 막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느니 말야."
하지만 다행이도 그를 이런 악몽과 같은 내면의 싸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즉 1856년 7월 마침내 슈만이 죽은 것이다.
슈만 사망 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의 양육과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이 커갔다.
그런 중에 그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험'(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이처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침착하나
더욱 깊이 있는 사랑의 공감으로 변해갔고,
외부의 장애가 사라지고 그가 자유롭게 클라라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여성이 없었을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여성도 클라라와 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뇌졸중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가졌고,
예술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 7일 완성하였다.
이 네곡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이 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여인의 사랑과 생애]
제7곡 : [가슴에 묻어다오](An meinem Herzen, an meiner Brust)
[쾌활하게 마음을 다하여]라고 지시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얻은 어머니로서의 기쁨과 자식에 대한 사랑에 젖어 있는 행복한 노래로 아름다운 양손의 16분음표의 음형으로 반주되고 끝부분은 템포를 약간 빨리하느 단순한 반주로 변합니다.
[가사줄거리] :
내 마음에, 내 가슴에 안긴 내 즐거움이여,
행복이란 사랑입니다.
전과 같이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는 너무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행복이 지나칠 정도예요.
어머니 만이 사랑한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거예요.
어머니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남자는 불쌍하지요.
귀여운 천사여, 너는 나를 보고 미소짓는구나.
제8곡 : [처음으로 고민을](Nun hast du mir den ersten Schmerz geten)
행복하게 지내 온 여자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됩니다.
낭독풍의 애가로, 노래가 끝나면 Bb장조로 전조하고 곡집
최초의 곡의 반주가 나타나 회고의 정으로 가슴을 칩니다.
[가사줄거리] :
당신은 지금 처음으로 나에게 슬픔을 주셨어요.
처음이지만 깊은 상처예요.
당신은 주무시고 있어요.
죽음의 잠을 주무시다니 무정한 분이시군요.
남겨진 저는 허무해요.
나는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산송장이어요.
나는 내 마음 속에 조용히 들어가 베일을 쓰겠어요.
그 안에 당신을 안고 잃어버린 행복을 찾겠어요.
당신은 나의 모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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