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이 1만원을 넘겼다. 영화 한편, 책 한권, 레코드 한 장 , 그리고 밥 두끼 값이 대개 비슷하게 간다는 것이 지난 30년간 내 관찰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 균형이 조금 깨졌다. 책값보다 영화 값이 절반으로 싸진 것 같고 밥값으로 쳐도 나같은 싸구려 밥을 먹는 사람의 기준으로는 두 끼가 아니라 세끼 쯤은 되는 것같다.레코드 아니 cd는 여전히 책값과 비슷하게 가는 것 같고. ( 이건 영화 쪽에 관객이 부쩍 몰리는 것과 밖에서 밥 사먹는 사람 수가 훨씬 늘어났다는 현상과 관련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책, 음반, 영화- 이 셋은 여전히 투자 대비 만족도 면에서 가장 효율이 높다. 다른 건 그만두고 책값 1만 5천원을 놓고만 따져보자. 서점에서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우리가 받아드는 것? 그건 단순히 250 페이지 분량의 종이묶음이 아니다. 나도 되쟎은 책을 내봐서 알지만 그 안의 내용물을 만드는데 드는 시간과 수고는 암만 휘갈겨 써내는 사람이라도 족히 1년은 걸리는 작업이다. 아니 준비 작업까지 합하면 1년 만에 쑥쑥 나올 수 있는 책은 없다. 게다가 한 인간의 혼신이 모조리 거기 녹아들기 일쑤다. 책 몇 권을 써 놓고는 다시 못 올 곳으로 가버린 작가들도 숱하다.
최명희의 혼불을 보면 책 안에 생명의 진액이 녹아들어간 게 훤하게 보이고 오주석의 옛그림 읽는 법을 봐도 젊은 열정을 책 안에 녹여 붓느라 병마와 싸울 에너지까지 지레 소모해버렸다는 게 느껴진다.
책은 말하자면 한 인간의 생명력을 종이 속에 흡착해둔 물건이다. 내용의 품질은 그만 두고 노동시간과 작업 강도로만 따져도 1,2만원으로 사들기에는 차마 미안한 물건이다. 이건 뒤집어 생각하면 독자에겐 책이 기중 실속있는 투자가 된다는 말이다. 타인의 시간과 노력을 , 그것도 엑기스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단돈 만 여원으로 내 걸로 만들 수 있는 게 책 아니고 뭣이 있을까. 종이와 활자로 만들어졌지만 책은 그냥 물질이 아니다. 물질과 정신이 절묘하게 화합한 것이 책이다. 평면 안에 입체가 활개쳐 날아가고 납작한 23센티 크기의 구체성 속에 우주적인 사이즈의 추상이 서늘하게 압축돼있다. 그러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시침 떼고 우리 앞에 툭 던져진다.
책을 쓰느라 목숨을 갉아먹었던 이들을 어리석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활자 안에 제 목숨을 얹어 그들은 자그만 불멸을 이뤘다. 절문 입구 사천왕상 앞에 서서 사천왕상의 손톱을 올려다보며 게으름이나 방심이나 더러운 때가 티끌만치도 용납되지 않는 깨끗함을 발견하는 강호의 눈 뒤에서 나는 강호를 탄생시킨 최명희의 눈을 느낀다.
절에 갈 때마다 사천왕상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사천왕상의 손톱과 눈망울과 복색을 바라보는 최명희의 눈길을 느낀다. 김홍도 그림에 붓으로 한 점 쿡 찍은 인물의 눈망울을 볼 때마다, 그 단 한번 붓질 안에 당사자의 직업, 성격,나이, 감정상태를 모조리 담아놓은 걸 들여다보라고 권하던 오주석의 어눌한 음성을 떠올린다.
책은 가장 손쉬운 황홀이다. 아무 준비없이도 잘만 고르면 30분 이내에 일종의 엑스타시를 맛볼 수가 있다. 한권 값이 나같은 가난뱅이의 세끼 밥값에 해당한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실은 별 불만없다. 책 한권 사려고 밥 세끼를 굶을 수야 물론 없겠지만 아무리 밥 세끼를 굶는다 해도 책 한권이 툭 튀어나올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밥값과 책값의 변화와 대비는 숱한 문화사회적 진실을 알려주는 지표가 될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는 밥 두끼를굶고 책 한권을 사드는 사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확실히 있었다. 밥 두끼는 인간이 내면의다른 욕구를 위해 굶을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다. 세끼라면 달라진다. 세끼를 굶고 책 한 권을 산다는 것은 이미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다.이 말은 밥의 가치가 하락하고 책의 가치가 높아졌다는 게 천만 아니라 밥과 책의 간극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것을 사회전체가 동의했다는 말이다.책이 많이 팔린다면출판사가 굳이 비싼 책값을 매기지 않아도 된다.
책읽는 사람이 많아져출판사 사장이책 값을 책정할 때 여전히 일반식당( 정확히는 대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식당)의 두끼 밥 값을 밑도는 가격을매겨도 되는세상, 그게 내가 산정한 좋은 세상의 기준이다.게다가 그 두끼 밥값 안에한 인간의 생명의 진액이스며들어 있다면얼마나 실속있는 투자이며 살맛나는 대차대조표인가.
(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밥 한 끼에 책 열 권 값의 식사를 하는 대학생도 종종 있다는 걸 나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이런 논의는 애당초 일반화가 불가능한, 실없는 농담에 불과하리라.)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의 한 귀절을 박주영이 저의 첫 소설 <백수생활백서>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것을 한참 들여다본다. .
–인간은 살아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동아누리 e칼럼 김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