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를 수록 여고 동창들과의 모임은새록새록 재미로 가득합니다.
정기적으로 매 월 두 째 주 토요일에 만나서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갑니다.
봄, 가을로는 원거리 국내 여행을 가고 5년에 한번은 해외로 여행을 갑니다.
12월에는 송년 음악회나 연극 등 좀 거한 문화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구요.
11월 모임엔 지리산 백양사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단풍이 절정은 아니지만 실망할 정도도 아니고 바람도 없이 조용하고 맑은 날씨에
적당하니 즐거운 가을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고 동창끼리는 수다 떠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단풍 구경은 명목일 뿐
긴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들도 우리가 어디 놀러간다고 하면 적극 협조를 합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단풍이 볼 것이 없다고 해도, 거리가 멀어도, 차가 밀려서 길이 주차장이 된다고 해도
비가와도, 눈이 와도,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우리는 중고등학교부터 40년 세월을 흐르는 이야기가 있기에 즐겁기만 합니다.
타인으로 부터 방해만 받지 않는 다면요.
만나면 수다가 밥보다 귀한 친구들이라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찌감치 자동차 뒷자리를 잡았습니다.
대형버스의 뒷자리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그러기에 모여서 수다를 떨어도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덜 되어서 우리에겐 좋은 장소입니다.
토요일이라 빈 좌석이 하나도 없이 꽉 차서 잠실을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행사에서 마련한 찰밥이 나옵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나간 길이라 플라스틱 접시에 비닐봉지를 깔고 그 위에
밥과 반찬 서너 가지를 얹어 주는데도 그 맛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꿀맛입니다.
밥을 먹고 나자 친구가 싸온 커피를 나눠 마시고
인삼 사탕에 껌을 씹으면서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저 앞에 앉았던 아저씨 한분이
우리 쪽으로 통로를 따라 걸어옵니다.
우리가 시끄러웠나?
순간 긴장을 했더니 우리 앞에 온 이 아저씨 하시는 말씀이
"우리는 남자끼리 왔는데 일행이 8명입니다. 남자들 만 앉아 있자니 자꾸 술만 마시려고
해서 그러는데 자리 좀 바꿔 앉으면 안 될까요?" 이러십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도 뒷자리의 오붓함을 양보할 수 없기에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노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도봉구 무슨 새마을금고 우수회원으로 믿을 만 한 사람들이니까
좀 섞어서 앉자고 조릅니다. 우리친구들이 섞어 앉자는 말에 기겁을 합니다.
자리를 바꾸자는 것은 우리 일행이 앞으로 가고 남자 분들이 뒷자리에서 편하게 술을 마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 분들 일행과 우리 친구들 즉 남녀 섞어 앉아 가자
뭐 이런 뜻입니다. 웃기는 거 아닙니까?
이 아저씨가 우리를 묻지마 관광 온 아줌마들로 알았나?
깔끔하고 품위 있는 K여고 친구들이 그런 꼴을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지요.
한 친구가 "우리 바쁘거든요. 방해하지 마시고 자리에 가 앉으세요."
큰 소리로 쌀쌀맞게 쏘아 붙입니다.
그 아저씨가 머쓱해 하며 돌아가고 우리는 한 달 만에 만났으니 밀린 수다가 엄청납니다.
누구네 딸이 결혼해서 둔촌동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누구 신랑이 간암이 발견되어 치료중이고
누구 딸이 장학금을 받아서 미국 유학을 가고
누구의 딸은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빈폴에 취직이 되었고….
귀를 쫑긋이 세우고 듣다가 뒷좌석 까지 잘 안 들리면 재방송도 하고
뒷자리 소식이 앞으로 전달이 안 되면 중계방송도 하고
옆자리 친구와는 지방방송도 하면서 여전히 시끄러운데
앞자리로 갔던 아저씨가 그새 술이 라도 마셨는데 얼굴이 불콰해진 모습으로
또 우리에게 옵니다.
"저희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이왕 여행 나왔는데 재미있게 하루 보내시면 좋잖아요?
같이 어울리십시다." 아주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중간에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수상한 남자가 뒤를 드나드니 신경이 쓰이는 듯 자꾸 돌아보십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가이드를 불러서 차에서 내리게 하기 전에
자리에 가서 앉으시라" 고 말씀 드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비틀 거리며 자리로 돌아갑니다.
지방방송 중계방송 재방송 생방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같이 놀자는
아저씨 때문에 방송 중단 사고가 자주 나니까 재미가 확 떨어져 버립니다.
방송이라는 것이 중단 없이 진행되어야 이야기에 탄력이 붙거든요. ^^
그래도 꿋꿋하게 다음 방송을 하려고 친구들이 그러는데
앞자리에서 다른 남자 분이 일어서서 또 우리에게 옵니다.
전에 전령사로 온 분보다 험상 굳게 생겼습니다.
오늘 하루 여행이 즐거우려면 명색이 회장인 내가 나서서 퇴치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경을 벗어서 넣고 색안경을 꺼내 씁니다. (도수 있는 썬 그라스니까 색안경이 맞습니다.)
앞자리 아저씨가 세 번째로 우리에게 오기에 색안경을 쓴 내가 일어섰습니다.
검정색 등산복을 입고 앉아 있는 옆에 와서 서면 일단 내가 밀리는 기분이 들거든요.
일어서서 그 아저씨 앞에 딱 서니까 눈높이가 맞습니다.
꿈적도 안 하고 앉아있던 우리들인데 내가 상대하려고 일어나자 좋은 신호인가 싶어서
그 아저씨는 얼굴에 화색을 띄고 한걸음 물러섭니다.
"저~~~ 선생니~임"
"네?"
"새마을 금고 우수회원 이시라 구요? 저는 일산시장 입구에서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엉뚱하게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 분은 순간 헷갈려 합니다.
그러더니 나에게 무슨 장사를 하냐고 묻습니다.
"제가요. 일산시장 입구에서 약장사를 하는데요, 쥐약 파리약 모기약 좀약 무좀약 같은 것을 팝니다.
(맞잖아요? 저는 거짓말은 안 해요.^^) 저 아줌마들도 다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모처럼 시간을 얻어서
이렇게 야외로 나왔거든요. 그런데 방해 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방해라니요? 기왕이면 함께 즐겁게 보내자고 하는 건데…."
"우리끼리 충분히 즐겁거든요. 방해만 하시지 않으면요. 선생님이 아니면 지금 진도가 더 많이 나갔을 텐데
방해하고 계신 겁니다.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신경 꺼 주세요."
술기운을 빌어 객기를 부리긴 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서 가는 모습이 귀엽더군요.
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었는지 "그렇게 안 생긴 분들이 되게 차갑네…. " 어쩌고 합니다.
그 아저씨가 돌아가자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배꼽을 잡고 웃습니다.
"얘 수니야 일산 시장입구에 가면 너 만날 수 있니? 지네는 안파니?"
이렇게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시골 장에 가면 두꺼비기름이라는 것을 해서 무좀에 바르면 낳는다고 박카스 병에 넣어서 팔고
발이 여러 개 달린 지네를 나무 꼬챙이에 포를 해서 팔기도 하고
쥐약이나 좀약 그런 거 팔던 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치근덕거리던 술 취한 아저씨도 그런 장면이 머릿속에서 연상 작용이 되었겠지요?
그러고 났더니 그분들이 백양사에 내려서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돌아 올 때도 아무 소리도 안 하더라 구요.
쥐약 약발이 좋은걸 까요? ㅎㅎㅎ
내가 얘기하고도 쥐약 얘기는 참 잘했다 싶어요. ^^
(혹시 수니가 쥐약 파는지 몰랐던 분도 계시나요?)
…..
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