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간디라고 불리는 호치민을 다시 생각하다

공항이 있는 하노이에서 하롱베이는
육로로 4시간을 버스로 가야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가도 내가 보고 싶은 정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월남은 정글이 많은 나라 일 거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우거진 숲에서 원숭이가 툭 튀어 나올 것 같고
땅에선 비단뱀이 엉금엉금 기어 나올 것 같은 밀림이 우거진 풍경을 베트남 하면 떠올렸습니다.

그러나산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우리의 시골과비슷한 풍경이 가도 가도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것을 잘 못 참는 내가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북 베트남에는 정글이 안보이네요?"
"정글요? 베트남엔 정글이 없어요." 가이드가 잘라 말합니다.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 속해 있고 열대몬순 지역이라 당연히 밀림을 생각했는데
실제로 펼쳐진 풍경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곳 기온을 보시면 모르시겠어요? 느끼시는 대로 여기는 서울 날씨랑 비슷해요.
남쪽으로 내려가면 밀림 비슷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니 내 생각속의 정글이라고 하면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을
사진 속에서 본 것이나 영화 속에 있는 풍경을 베트남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베트남의 날씨는 습기 없이 뽀송뽀송하면서 맑고 쾌청했습니다.

그러면 전쟁 중에 왜 고엽제가 뿌려졌을까?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도 별로 없는 평지가 이어진 곳에서 전쟁을 하면서 우리가 말하는

아군이 불리해서 엇을까?
그 당시의 월남 전쟁을 상상해 봅니다.
상상이라는 것은 옛날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조합해서 그려 보는 것입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군대는 월남전 때 용맹한 군인들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군인들은 서서 다니다가 땅굴을 파고 지하에서 총을 쏘는 베트콩들에게
표적이 되었지만 날쌘 우리의 병사들은 베트콩이 가장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숲이나 풀밭의 엄호물을 없이하기 위해 고엽제를 뿌렸을까?

키큰 미국병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찌 되었든 고엽제 문제는 나에게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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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지도입니다. 남북으로 길고 위로는 중국에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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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이 사용하던 검소한 가구들………….대통령시절 집무실 후원의 침소주택

생전에 집무하던 사무실, 침소, 사용하던 가구나 소품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검소해 보입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정치적인 현실과 결혼 했노라는 선언으로 독신으로 지냈고
복장이나 표정들도 자유와 소탈, 소신의 집념과 달관의 미소가 머금어져 있습니다.
호치민을 간디의 또 다른 이름으로 "총을 든 간디"라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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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통일의 아버지 호찌민은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이며 혁명가, 사상가, 정치가로서 전인격적 존재로
지금까지도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민족의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의 영원한 선각자입니다.
호찌민의 옥중일기는 문학으로서도 완성도가 높은 향기와,
오로지 베트남의 자유와 통일을 쟁취해 보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친필 서한들을 호치민 박물관에 가서 보면서
한 글자도 해득하진 못했지만 호치민이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 전 프랑스에 살 때 그는 베트남의 상황을 편지 쓰 듯 몇 장씩 써서 광장에 나가
나누어 주었는데 그 글을 받아 읽어 본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후원을 받아 잡지를 하나 창간하게 되었답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으로 베트남 학생들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 지식인을 길러 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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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가지는 권위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조그만 영업장소에서 호치민 사진과 베트남 국기가 걸려 있습니다.
호치민은 국민의 영웅을 넘어서 호치민이 곧 베트남이었습니다.
베트남 독립 운동가였고 청빈하고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박한 삶의 모습과 그 내용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진정한 존경을 받을 만했습니다.
호치민 기념관의 장치와 사진들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 곳이나 누구에게도
나무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맞대고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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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번에 갔을 때 호치민의 시신은 그곳 영묘에 없었습니다.
1년에 3개월씩은 방부처리의 지속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그 방면의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로 싣고 가 화학처리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분의 잠든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답니다.
레닌은 온갖 굴곡의 상황에서도 아직까지 자연으로 묻히지 못하고 있고
김일성은 아직도 그 투명 유리벽 상자 속에 누워 있다는데
호치민은 죽기 전에 "화장을 해서 뿌려 달라."고 유언까지 했다는데
소박했던 개인적 유언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죽지 못한 채 거추장스러운
러시아 여행을 일삼고 있는 것을 볼 때 베트남을 위해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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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화폐단위에는 오직 그의 초상화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화폐에는 율곡도 있고 우리가 젤 좋아하는 배춧잎에는 세종대왕님
이 계시는데 저는 세종대왕님이 계셔서 배춧잎이 좋은지
배춧잎의 가치를 좋아하는지 하여간 파란 배춧잎을 좋아합니다.
호치민의 초상이 있는 베트남 돈인 “동”은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친구가 23.000원을 가지고 이십오만 동으로 환전했다고 하니
달러로 계산하면 가치가 어떻게 되는지 머리가 좋은 분은 계산해 보세요.
저는 머리 쓰기가 싫어서 모르겠습니다.

호치민은 베트남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중심이고
호치민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윤리적 자존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거리낌 없이 소탈한 서민적 풍모는 그의 카리스마의 특징입니다.
서구의 열강들을 물리친 깊은 자존감에는 그의 얼굴이 척추처럼 각인되어 있고
도덕적 의식에는 그의 삶이 금자탑처럼 쌓아올린 지표가 든든한 중심이었습니다.
베트남에는 오직 그의 권위만 존재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지금의 베트남은 빗장을 풀고 온 국토가 공사 중이었습니다.
베트남엔 석유까지 나는 자원의 장점도 있고 인구의 80%가 20~30대 젊은 분들이고

똑똑하고 예민해 보였습니다.
분명 아시아에서 또 다시 기적을 일궈내는 한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이

2 Comments

  1. 벤조

    2008-11-14 at 16:05

    음식먹고 선물사고, 그런 말이 없으니
    아직은 의식 있는 순이씨로 보입니다.
    나중에 원조 월남국수 얘기 쓸건가요?   

  2. Lisa♡

    2008-11-15 at 14:22

    벤조님.

    순이님은 소비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ㅎㅎㅎ
    호치민이 죽으면 4등분을 해서 다리는 어디를 향하고
    머리는 어디에..뭐 이런 식으로 나라사랑을
    표했다는데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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