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입니다.
왕궁에 어울리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여자들 사이에 아주 못생긴
키 작은 여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씨 책의 표지로 사용했습니다.
키와 얼굴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시대에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최초의 소설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박민규씨의 소설로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에는 전혀 예쁘지 않은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녀가 지나가면 민폐를 끼친다고 수근 거리는 사람이 있고
경리직원은 못생겨야 사고를 치지 않는다고, 예쁘면 인물값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그래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일찍이 포기하고
자기만의 방어벽 속에 갇혀 사는 여자를 사랑하는 잘생긴 남자의 이야깁니다.
작가의 표현처럼 "깜짝 놀랄 만큼 못생긴 추녀"를 위한(?) 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쁘면 좋아하고 못생기면 싫어할까요?
그리고 예쁘다는 기준이 뭘까요?
그건 우리가 관념적으로 만들어낸 허상 아닐까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잘생긴 아버지와 못생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삼류배우였던 잘생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기생하듯 하여 살아가다가 유명해지자
아들과 아내를 버리고 미모의 여성에게로 새장가를 가 버립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잘생긴 외모를 스스로 업신여깁니다.
그가 20살이 되어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여주인공을 만납니다.
여주인공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못생긴 외모를 갖고 있고,
그래서 마음속에서 자기의 얼굴을 지워버린 존재감이 없는 여자입니다.
잘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 이 둘이 만나고 헤어지고 세월이 흐르는 과정을
남자 주인공의 회상 형식으로 그려나가는 이야깁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본 영화나 책의 주인공은 다 예쁘거나 잘생겼습니다.
나 또한 그것을 당연한 도식으로 생각하면서 한 번도 못생긴 사람이 사랑받는
소설은 없을까 하는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껏 만난 모든 주인공은 고난 속에서도 빛을 낼 수 있는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예쁘지 않으면 최소한 외모의 어느 한 군데는 감탄하고
경외 할 구석이 있어야 말이 되었습니다.
눈이 호수처럼 깊다든지 피부가 희다든지 윤기 나는 머리칼을 가졌다든지
목이 길다든지 표정이 선하든지 ….
그녀에 대하여 외모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은 없지만
못생긴 것은 다 추방해야할 더러운 물건 취급을 아주 당하고
그녀를 벌레 보 듯 한다는 것에서 그녀의 못생긴 정도를 가늠해 봅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말도 듣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나도 동승했던 못생긴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하는
충격적이 글이었습니다.
나도 그랬을까?
나도 평생에 외모로 덕을 본 일은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손해도 본 적은 없다고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예쁘다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외모로 인한 프리미엄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건 손해라는 계산이 나오지 않나요?
똑같이 노력해도 예쁜 사람은 더욱 앞서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유로 잘생긴 사람을 질투한 적은 없었겠지만
예쁜 것 아름다운 것 좋아하니까 못생긴 것에 대하여는 후하지 못했을 거란 반성을 합니다.
그런데 외모로 인하여 손해 보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고쳐야할 폐단입니다.
단지 외모 때문에 그 사람이 지닌 인간적인 모든 것이
멸시 받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못생긴 엄마를 버리고 대단한 미인과 재혼을 한 영화배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체념,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못생긴 엄마에 대한 연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배경이 되지만 그것도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 남자가 그런 가족적인 배경이 아니었으면 그런 사랑을 했을까
의문을 가지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해답을 겸한 소설적 장치로
곰에 비유되는 엄마를 배경에 두었습니다.
아버지가 영화배우로 성공하기 전에 엄마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다녀서
남편과 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사는데 아버지는 집에서 오이를 잘게 썰어서
얼굴에 붙이고 피부에 신경을 쓰는 등 얼굴과 몸매를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우립니다.
결국은 곰처럼 미련하고 못생긴 아내를 발판삼아 영화배우로 성공하자
당연한 듯이 대단한 미인을 아내로 맞아 새 생활을 시작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니면 무의식 적으로 따지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학력 직위 돈 배경 …..이런 것에 외모까지 특출하면
그 사람은 더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그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위축되고
투명인간이 되어갑니다.
(존재하지만 하찮게 여겨 투명인간 취급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치들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축하게 하고
스스로도 패자의 길을 선택하도록,
혹은 투명인간의 삶을 살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강요합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데
외모가 누구의 용서를 받고 용서를 빌어야할 일인가요?
농담으로 퍼져나간 말이지만 괘씸하기 이를 대 없는 말입니다.
상처 많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고 있습니다.
교보문고가 문을 닫아서 인터넷으로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해 왔습니다.
거의 비슷한 성장 소설로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김주영씨의 “빈집“ 그 외에도 여러 권을 집과 점방에서 동시에 읽기 시작했는데
박민규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먼저 끝낸 것은
그 소설에 더 집중할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장소에서 남의 시선을 확 끌어버리는 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훤칠한 외모의 젊은이. 둘의 사랑이 평탄했을까요?
서로의 진심을 아는데 가장 큰 장애는 여자의 마음속에 쌓여진 방어벽이었습니다.
방어벽을 그녀는 왜 쌓았을까요?
그녀 스스로가 주위에 방어벽을 만들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그녀가 속해 있는 사회 전체가 공범이 되어 만들어 버린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자긍심의 문제로 보여 집니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본인의 외모에 만족 한다면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멋진 외모라도 자신감이 없으면 초라한 모습이 됩니다.
박민규 소설은 외모 콤플렉스를 벗겨주려는 시도의 소설이지만
오히려 외모가 강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그 내면을 보고자 하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사랑스럽고 보고 싶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에 멋진 펀치를 날린
박민규 다운 소설이었습니다.
외모에 가치를 두는 사회적인 편견은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순이
흙둔지
2010-06-23 at 02:49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보이는 못생긴 여인은
난장이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왕의 총애를 받았던 난장이 여인입니다.
장애인을 작가가 못생긴 여인으로 비교한 것은 대단한 실수로 보여집니다.
일반적으로 못생겼다고 하는 것은
보편타당적으로 겉모습만 보고서 외면하고픈 인물이지 장애인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러나 이쁜 여자는 그 자체가 무기라는 말도 있답니다. ^_^
Lisa♡
2010-06-23 at 08:36
순이님.
요즘은 못생긴 건 용서해도 뚱뚱한 건 용서 못한다는 말도 있어요.
못생긴 건 성형하면 된다는 그런 의미로 하는 말로 들려요.
남자들도 마찬가지구요..비단 여자에게만 쓰이는 말은 아니라고 봅시다.
성에
2010-06-24 at 01:33
간만에 의미있는 좋은 글, – 불로그 속에서 – 잘 보았습니다.
근데 외모지상주의가 특히 한국서 심한 듯하고, 그리고 비교하고
비판하며, 그러면서 또 따라하는 유행성 열풍도 그곳이
유난한 듯 보입니다.
너무 남들을 모방할 것만 아니라 스스로의 자존과 가치관으로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있는 내면을 가꾸는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자운영
2010-06-25 at 13:29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희 아이들은 조국인 한국에 대해
몇가지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에 가면 사람들의 첫 인사가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요.
어머~ 이쁘게 생겼네…라든가
언니가 키가 더 작구나..(동생이 더 크네)라든가…하는 그런 거요.
이곳에선 아무리 좋은 표현도 외모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게 상식이거든요~!
성형왕국(뉴옥타임즈 발표된) 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나라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 아가씨들이
공중예의도 없고 어른 공경할 줄 모르는 모습들을
고국에 나가 볼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부정적인 댓글이 죄송하지만
우리나라엔 순이님이 쓰신 이런 글들이 많이 쓰여져서
국민운동으로까지 번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나무.
2010-06-30 at 07:00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지금 호른 연주로 듣고 있습니다
서울서 가지고 온 단 한 장의 연주 실황CD 라
저도 박민규작가 팬이랍니다 글도 참하고 무엇보다 겸손한 젊은이라…
더 애정이 가는 작가랍니다
리뷰도 참 실감나게 잘 쓰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