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떨어졌지만 사치한 설날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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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휴 3일 동안
우리 집에서 한 끼에 평균 20명 이상이 식사를 했습니다.
설날 당일엔 찻상만 받고 돌아간 손님 말고
식사를 한 밥그릇을 따지면 약 백그릇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식당도 아닌데 하루에 100명 넘게 밥을 먹이고 연휴를 보냈더니
오늘은 쌀이 똑 떨어져서 쌀사러가기도 귀찮고
남은 식구들은 냉장고 정리도 할 겸 해서 햇반을 먹어야 합니다.

엥겔법칙으로 따지면 이번 달은 엥겔지수가 무지 높을 것 같습니다.
엥겔지수가 높다고 해서 가난한 설날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사치한 설날이 되었습니다.
우리 오라버니의 아들이 군대 다녀와서 대학 3학년이 되는데 성악을 전공합니다.
키는 189센티이고 체중이 100킬로가 넘는 바리톤입니다.
그 몸통에서 흘러넘치는 노래는 작은 거실을 쩌렁쩌렁 울리는데
노래 듣기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사치하고 즐거운 명절은 평생 처음입니다.
우리 집에서 연대는 버스를 한번만 타면 가니까 올해 기숙사에 못 들어가면 우리 집에서

통학을 할 것 같아서 매일 바리톤 가수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를 해 봅니다.
나는 노래는 못하지만 듣는 귀는 제법 발달을 해서 잘하고 못하고는 구별하는데
우리 조카가 부르는 노래는 워낙 거대한 체격이라 울림통이 커서 그런지 소리가 좋습니다.
내 조카라서 점수가 후한 면도 없지는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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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조카가 노래하자 어린 조카들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합창을 하기도 하고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해서 우리 집 거실은 그야말로 하우스콘서트가 되었습니다.
유명인은 아니라 해도 우리 집에서는 촉망받는 음악가들 아니겠습니까? ^^
우리 작은 딸도 큰 한인교회에서 반주를 하던 실력이라 피아노 솜씨가 들어 줄만하고

어린아이들의 천사 같은 목소리는 파리나무십자가 합창단과 비교할 만합니다. ^^
나는 우리 조카들에게도 허풍을 잘 떨어요.
가령 성악을 전공하는 조카에게 "고모가 나중에 너 독창회 하면
100명 표는 팔아 줄 수 있어 그러니 관객 걱정하지 말고 독창회 한번 하자." 라든가
"내가 해 줄게 뭐든지 말해봐" 이러며 백지수표를 남발하는데
그 목적이 선하면 이루어지기도 해서 어느 면에선 긍정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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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께서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목사님이시니까 그러시기도 했지만 찬송가를 늘 부르셨어요.
집에서도 혼자 찬송가를 들고 서서 앞장에서 부터 마지막 장까지
좋아하는 찬송을 찾아서 열곡 스무 곡을 연달아 하시는데. 우울한 날은 천국의 소망을 담은 찬송가를

추수때가 되면 추수감사 노래를, 절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골라 부르십니다.
나는 관객이 되어 아버지의 찬송하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안계시지만 그런 음악에 대한 사랑이 우리 대를 거쳐서
자녀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혈통이나 유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노래도 자꾸 부르다 보면 머리에 음악 길이 난다고 하는 군요.
우리 아버지가 손자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우리어머니도 좋으셔서 또 해봐라 또 해봐라 하시면서 박수를 치고 우리는 브라보! 를 외쳤습니다.
돈 까를로에 나오는 까를로 친구가 부르는 바리톤 노래를 원어로 부르고
우리가곡 뱃노래, 그리운 금강산, 우리도치 결혼식에서 불렀던 10월의 어느 멋진 날, 찬송가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식사가 끝나거나 새로운 손님이 오거나 누가 부르라고 하면
빼는 법 없이 그때 마다 새롭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들이 많으니 명절 때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같으면 우리어머니께서 100살 정도는 거뜬히 사실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손자들이 결혼하고 자녀 낳고 해서 모이면
점점 더 하우스 콘서트에 모이는 사람이 늘어나겠군요.
그러면 나의 이야기는 더욱 많아질 것 이구요.
지금도 나에게 손자가 생기면 그 이야기를 다 어떻게 감당하고 읽어주느냐
걱정하는 분도 계시긴 하지만
저는 가능하면 많은 이야기의 흔적을 남기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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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면 꽃이 피었다고, 음악회에 다녀오면 음악을 들었다고
점방에 오는 손님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 그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식구들이 모이면 모였던 이야기를,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그 맛난 이야기를 글로 남겨두면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우리 자녀가 또 손자가 내가 남긴 글을 읽게 되겠지요.
나는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딱히 어떤 글을 쓰고 싶어 작정하고 쓰기보다, 매일 매일 이런 글 쓰는 일을 즐기거든요.
블로그에 이런 이야기를 남길 수 있어서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작가가 되겠다, 책을 내겠다, 이런 생각은 전혀 없어도 뭐든 써 놓고 보면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읽어 주는 약간의 블로그 독자도 있고
나중에 내가 읽어 봐도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고 새록새록 재미있습니다.

하우스 콘서트를 하면서 쌀이 떨어지도록 많은 사람이 밥을 먹었고
많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높은 엥겔지수에 비해 이만하면 호사스러운 설 명절이 맞지요? ^^

순이

8 Comments

  1. 벤조

    2011-02-06 at 02:11

    아하, 좋다!
    안 잡숴도 배가 부르다~~~그 말씀이지요?
    이야기꾼 순이님, 정말 좋은 목표를 가지셨어요.
    순이님 가정과 같은 가정이 늘어나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류와 우주평화를 이루는 길! 너무 거창했나요?ㅎㅎ

       

  2. 이나경

    2011-02-06 at 02:21

    저도 순이님처럼 그냥 일상의 흔적들을 남기는 도구로 블로그를 씁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니 조금 부담은 되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이웃을 확장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쭉 나가면 편하겠구나 생각도 합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블로깅을 하면서 이렇게 소중한 글을 만나게 되어 기쁘답니다.
    조카분이 성악을 하는군요.
    제 조카도 성악을 전공해서 언제 한 번 노래방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조카도 바리톤이었지요. 그 조카가 전공을 바꾸어 편입해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그쪽 관련일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소질과 취미을 잘 찾아서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겠지요. 순이님의 허풍, 표를 백장 팔아준다는 약속은 뭐 그리 허풍이 아닌 듯 합니다.
    나중에 콘서트 일정 잡히면 제게도 연락 하세요. 제가 스무장쯤은 팔아드릴께요..ㅎㅎ
    저도 허풍(?)…..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부럽습니다.   

  3. 데레사

    2011-02-06 at 08:32

    참 좋다! 나도 감탄을 합니다.
    집안 가득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설명절을 즐기는 모습도 요즘은
    흔치 않은 세상인데….

    늘 행복한 삶이기를 바래요.   

  4. 소리울

    2011-02-06 at 10:55

    참 좋다, 좋다, 거듭 부럽고 부럽습니다.
    음악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아름다운 삶 안에 늘 순이님이 계시군요   

  5. 한들 가든

    2011-02-06 at 23:48

    헉… 100명 곱하기 오처넌= 오십마넌 ~~ ㅋㅋㅋ~

    한들 가든을
    수니님의 집으로
    밥다라이 들고 올라갔써야 하는긴데,~에휴~~ 쩝

    풍부한 바리톤으로 설을 보내신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6. 잎사귀

    2011-02-07 at 05:49

    굉장하네요 ^^
    순이 님 블로그에서 부러운게 참 많은데
    바리톤조카~~차암 좋아보입니다^^   

  7. 참나무.

    2011-02-08 at 02:21

    엥겔지수보다 더 놓은 문화지수 캡입니다..진짜 하콘이네요…!
    저도 조카 연주회 티켓 몇 장 책임질 수 있답니다..ㅎㅎ

    그리고 설날 알베기 조기먹으며
    ‘한 토막이 얼마라더라? ‘ 하고 순이 님 얘기하고 즐거웠답니다..^^
       

  8. 블루바다

    2011-02-11 at 22:55

    순이님 좋은 명절을 보내셨군요. 손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저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순이님의 가정이 작은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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