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석류알 만큼 많은 사연을 담고

결혼하기 전 부모님과 살 때는 사택이나 셋방으로 전전하느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년 마다 이사를 했습니다. 많은 자녀가 있어서 우리 부모님 얼마나 이사하느라 고생을 하셨을 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는 일입니다. 가장 짧았던 거주기간을 기록한 것은 일주일입니다. 어느 해에 석류가 있는 오래된 고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방이 20칸쯤 되는 오래된 기와집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다 나가고 없어서 그랬는지 행랑채가 비어서 적적해서 사람을 들였는지 경제적인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주인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하는 분 내외와 함께 사셨고 부엌이 달린 방 두칸을 빌려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어른들께서 우리 집 식구 중 아이가 많은 것에 이사 첫날부터 시선이 곱지가 않으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철없는 남동생이 마당에 있던 석류나무에서 한창 보기 좋게 열려있는 석류를 땄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노발대발 하시며 당장 나가라고 해서 일 주일 만에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석류 한개 보다도 못했던 셋방살이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사를 무슨 재미난 놀이쯤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살던 15살 사춘기 소녀 땝니다.

고택으로 이사한 다음 날 이었나 봅니다. 마당에서 놀던 6살 된 남동생이 석류를 한개 따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동생에게서 석류를 받아 들고 난감한 모습으로 주인 할아버지께 사과드리러 갔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마당 가운데로 나오신 할아버지는 목청껏 소리 지르시며 화를 내십니다. 한손엔 석류를 들고 한손엔 지팡이를 짚고 한복을 입은 그 할아버지가 내 눈엔 염라대왕처럼 보였습니다. 그분 말씀의 높낮이 때마다 들었다 놓았다 하시며 휘두르는 지팡이가 중죄인의 모습을 하고 그 앞에 서계시는 어머니를 내리 칠 것 같아 무척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해서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내가 막아섰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사과를 하셨고 할아버지는 우리랑 한집에 살 수 없다고 당장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석류나무를 통 채로 뽑아 버리고 싶은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그때 처음으로 경험 합니다. 그렇게 진한 "살인적인 분노"의 감정은 그 이후엔 경험하지 않은 듯합니다. 15살 사춘기 소녀라 수줍음도 많고 도전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어른들께 말대꾸도 하지 않던 땐데 "이사 가면 될 거 아니냐? 석류가 그렇게 중요하냐? " 며 나를 말리는 어머니를 곤란하게 하면서 까지 할아버지께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다른 곳에 집을 얻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햇볕이 쨍쨍한 날 이삿짐을 마당가운데 들어 내 놓았는데 시원하고 그늘진 대청마루에서 내려다보던 그 할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초라함이라니요. 비참한 마음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눈물이 울컥 솟아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삿짐이라야 리어카로 몇 번 나르면 되는 것들인데 가장 큰 것이 이불 보퉁이고, 옷 보따리, 책상, 책, 그런 것입니다. 그나마 중요한 살림이라고 생각되는 괘종시계와 거울 사진 액자 등은 오라버니와 들어서 날랐습니다. 부엌살림을 햇볕 가운데 꺼내 놓은 것 보신 적이 있나요? 석유곤로, 솥단지, 주전자, 그릇, 연탄집게, 겔레 빗자루 그런 것을 보는 일은 치부를 드러내고 거리에 나 앉은 것만큼이나 비참한 일인데 그늘진 대청마루에서 빛나는 흰옷을 입고 내려다보던 그 할아버지의 실루엣이 충격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정원에 심겨진 석류가 회손 될까? 우리 식구가 떠나도록 끝까지 지키고 계셨던 겁니다. 가난의 폭력성 무자비함, 설움으로 부터 어머니를 보호하고 다시는 경험하지 않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시작한 것이 그때 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무슨 일을 결정하기 어려울 때는 "어머니가 좋아 하실까?"에 초점을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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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구정에 석류가 한 박스 선물이 들어왔습니다. 석류가 어른 주먹보다 더 크고 단단한 껍질로 쌓여있습니다. 겉은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색을 띄고 그 속에 석류 알이 그야말로 알알이 영글어 있습니다. 석류 한 개를 쪼개고 보면 자수정 같은 알갱이가 수 백 개 박혀있습니다. 알갱이를 깨물면 조그만 씨앗이 있고 붉은색 포도주 같은 과즙이 나오는데 그 맛이 새콤달콤합니다. 석류가 중년여성들의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더니 대량 수입이 이루어졌나 봅니다. 빈혈에 좋다고 해서 좀 먹어볼까 하는데 먹기는 편하지 않습니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사과가 있어도 저는 깎기가 귀찮아서 못 먹는데 옥수수 알 따 먹듯이 석류 알을 한 알씩 뜯어 먹는 것이 쉽지 않은 노동입니다. ^^ 석류가 눈으로 보는 것은 좋은데 먹는 것으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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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빌려왔습니다)

석류는 먹기 번거로운 것도 있지만 석류나무가 있던 고택에서 일 주일 만에 이사를 한 아픈 추억이 있는 열매라 나에겐 심적으로 불편한 열매입니다. 석류만 보면 그때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집스럽게 그 기억을 못 잊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히지가 않는지 가난에 대한 고통을 그것으로 상기시키는 것인지 하여간 석류는 내안에 폭력적인 마음을 처음으로 폭발하게 만든 아주 나쁜 열매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석류를 보시더니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말씀하십니다. 난 이사한지 일주일 만에 쫓겨 난 줄 알았는데 어머니 말씀으로는 3 일 만에 쫓겨났다고 하시는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머니 기억이 더 정확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많은 식구의 안위가 석류 한개 보다 못 한시절을 살았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쫓겨난 것도 아니고 석류 한 개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과를 드렸는데도 기어이 내 쫒는 그런 비정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지금껏 살아계셨으면 이란 산 석류라도 한 박스 선물했으면 좋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쓸쓸히 웃으시는군요. 우리 어머니 참 험한 시절을 살아오셨습니다. 그 할아버지 지금까지 살아계실리 없고 살아계신들 100세를 훨씬 넘긴 연세이실 듯 합니다. 나무에서 석류를 딴 철없던 남동생도 이미 저세상으로 먼저 가고 없습니다. 아픈 추억이 있는 석류라서 그런지 과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서도 석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시들합니다. 한개 쪼개 놓은 석류가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는데 나도 그다지 손이 가질 않습니다.

순이

4 Comments

  1. 이나경

    2011-02-08 at 16:05

    에고, 그 석류 할아버지 정말 너무 하시네요.
    그깟 석류가 아무리 중해도 사람 보다 중할까요?
    어린 마음에 하나 땄다고 하면 귀여워서 저 같으면 대여섯개 따 주겠구만….
    예전엔 고집불통 벽창호 할배도 많았나 봅니다.
    그 할아버지 찾아가셔서 설날 생긴 석류 갖다 드리면서 한말씀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할아버지, 그때 석류보다는 못하겠지만 석류를 무지 좋아하셨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서 가져왔습니다.’라고 해보고 싶어요. 저도 잠자리에 들어야하는데….클났네요.   

  2. 한들 가든

    2011-02-09 at 03:41

    에휴,,,^^

    할배요~ 와카요? ㅎㅎㅎ
    석류 그기 머가 그리 큰기라꼬 ~

    이사 그거 쉽습니다, 보따리 들어 하면 씩씩하게
    연탄집게 둘러 매고 가는거지요 머~~ ㅎㅎ

    나훈아 노래구절 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 석류가 웃는 이유를 ♬

    나훈아 작사.작곡

    1.마른하늘에 비가내린다
    소리없이 흘러내린다
    마름가슴에 눈물이흐른다
    울다남은 눈물이 흐른다
    인연이라는 만남도있고
    운명이라는 이별도있고
    너는모른다 또나도모른다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후렴)울지를마라 석류가웃는다
    허허허허 널보고 웃는다
    넌들알겠니 난들알겠니
       

  3. 소리울

    2011-02-09 at 08:45

    이런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고 순이님께 석류를 선물한 이는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저는 그 생각이 드는군요. 석류 할배는 그렇다 치고…
    아픈 기억은 정말로 오래 가는 걱 같아요.
    누구에게나 한 두가지 있는 고질적인 아픔,
    석류 고까짓것, 그냥 이제는 질겅질겅 다 잊혀졌으면 좋으련만…   

  4. equus

    2011-02-11 at 10:05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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