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순간에 기적을 만든 남자의 눈물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사람은 일본 사람인가 할 정도로
일본인 같은 모습이 몸에 배었습니다.
더운 여름인데 넥타이까지 맨 양복차림으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친절함이
조금은 거부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물어보면 일본 사람들이 잘 하는 제스처 즉, 허리를 여러 번 숙이면서 금방
속이라도 빼어 줄듯이 저자세로 우리 일행을 대해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이드를 맡은 분은 45세쯤 되는 나이로 중후한 중년이었습니다.
큰 회사의 중역 같은 포스가 있었는데 살아온 역사는 여행업계의 역사와 같이했습니다.
일본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시작 했는데 그 일이 평생 직업이 되었노라고 합니다.
한때는 목에 기브스를 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남 보기에 교만 했었고 이 직업에
자부심을 느꼈고 돈을 많이 벌었답니다.
일본 여행업계에서는 베테랑에 속하기 때문에 큰 기업체에서 보내는 직원 연수
공기업이나 대기업 중역들 그리고 국회의원 같은 높은 분, 대 규모 산업연수생
들의 안내를 맡는 일을 주로 했답니다.
그러다 IMF 때 한 풀 꺾이고 리먼 쇼크 때 결정타를 맞고
(리먼 쇼크가 여행업계에 어떻게 작용이 되었는지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다시 설명해 달랠 수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번 일본 동북부 쓰나미와 원전 폭발로 인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정도로
일본 여행업계가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하는 의미는 본인이 전에는 큰 기업체 연수만 담당할 정도로
커리어가 있는 사람인데 여행업계 전반에 어려움이 있다 보니 이렇게 작은 규모의
그룹을 안내하는데 당신들은 행운이다 대강 그런 뜻으로 들렸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보면
비싼 여비를 들여서 왔으니 촌음을 아껴서 구경을 하고
현지를 즐기려고 스케줄을 쉼 없이 강행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는 일터를 떠나면 누워서 책을 보거나 자는 것을 가장 행복한 일로 여기기 때문에

온천에 내려주면 온천을 한 후에 일찍 잠자리에누워 책을 보다가

아침 모닝콜이 울릴 때 까지 맘 놓고 푹 잠을 잡니다.
해외에 까지 와서 잠만 자면 아깝지 않느냐고 하는데
쉴 수 있을 때 쉬고 책 읽고 잠자는 것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즐기러 온 사람들은 일행과 함께 여럿이 움직이는 것은 일에 속하고
일행과 헤어지고 부터가 노는 시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밤에 할일이 더 많습니다.
일본에 왔으니 라면도 먹어봐야겠고 밤 문화도 즐겨야 하고 ….
잠을 안자고 밤 문화를 즐기다 보니 수면이 부족하여 모자란 수면을 낮에 보충하느라
차에 오르면 잠을 자고 무슨 순서가 있어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가이드가 뭐라고 안내방송을 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어떤 분은 코까지 드르렁 거리며 잠을 잡니다.

단체의 행사를 맡은 가이드는 버스에 타서 마이크를 잡으면 꼭 얘기를 해야 하는 법이 있는지

손님들이 자든 말든 가이드는 현지에 대한 설명을 끝없이 합니다.

역사를 이야기 하고 문화를 설명하고 경제를 이야기하다 옆으로 세면 개인적인 이야기도 합니다.
나처럼 이야기를 밝히는 사람은 남들이 자는 시간에 가이드가 쓸데없이 하는
개인사도 열심히 잘 듣습니다.
귀 기울여 듣다가 보면 알아지는 것도 있고 남이 살아온 이야기엔 내가 몰랐던
대리 경험을 할 수도 있고 그 당시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에 잠도 열심히 자 두었겠다, 이야기 듣는 것 좋아하겠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들려주는 얘기는 흥미진진합니다.

이건 가이드 개인사에 속하는 얘깁니다.
한참 잘 나가던 때인데 200명이 넘는 산업연수생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답니다.
10여 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연수를 가곤 하였던 것 같습니다.
큰 행사의 총 책임을 맡아서 서울에서부터 손님들을 모시고 일본을 가는데
서른 명 단위로 가이드가 따로 있어서 자기는 돈 관리와 총괄을 하면 되었답니다.
서른 명씩 한 조로 움직이니까 자기는 혼자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을 하러 가다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사람이 넘어져 있고 명찰을 달았는데 자기가
책임 맡은 여행객이더랍니다.
연수생 중에는 장애인이 몇 명 함께 간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답니다.
장애인용 크러치를 비행기에 못 가지고 들어가니 휠체어에 앉아서 탑승구로 이동을 하다가
휠체어를 밀어주던 분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부주의해서 앞으로 넘어진 것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른 뒤돌아서 넘어진 손님을 일으켜서 휠체어에 앉히고 하는 10여초 상관에
옆에 두었던 가방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가방 속에는 행사 진행비가 수억 원이 들어있었답니다.
여행사 용어로 현지 숙박비를 지불하고 차를 운행하고 견학을 하고 하는 것을
행사 진행을 한다고 하고 거기에 쓰이는 비용을 행사진행 비라고 하나 봅니다.

가방을 잃어버려 돈을 찾지 못한다면 당장 일본 공항에 내려서부터
수백 명을 먹이고 재우고 연수를 할 경비가 없다고 생각하니 아득한 일입니다.
행사 진행비를 다 잃어버렸으니 이 많은 여행객을 모시고 일본을 어떻게 다녀온단 말인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깜빡 놓친 듯도 하고
순식간에 어머니 얼굴도 지나가고 아내와 자녀의 모습도 눈앞을 스쳐갑니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이 없는데 너무 기가 막히니의지와 상관없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잠시 후에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쏟아져 내리더랍니다.
공항 경비대에서 오고 수사요원이 오고한들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진 가방은
돌아올 리 만무 합니다.
공항 경찰이 비행기 이륙시간이 다가온다고 하면서 비행기 탑승을 종용하면서
찾으면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엔 잃어버린 가방을 찾지는 못한다며 희망의 말 조차도
끊어버리고 말더랍니다.

어찌 되었든 비행기 출발시간은 다 되었고 눈물 콧물을 닦은 휴지가 수두룩하게
옆에 있어서 그걸 주워서 휴지통에 버리려고 하는 순간

쓰레기통 속에 자신의 검정 가방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더랍니다.
커다란 원통으로 되어 가정에서 쓰는 들통의 서너 배 쯤 되는 크기의 쓰레기통에
지름이 50cm쯤 되는 쟁반 같은 뚜껑이 달려서 한쪽을 누르며 쓰레기를 버리면
반대편 반이 열리는 그런 쓰레기통을 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도둑인지 소매치기인지 급한 대로 가방을 훔쳐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구경꾼들 속에 함께 섞여서 현장에 있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가 버리기를 기다렸다가 가방임자가 탄 비행기가 뜨고 나면 가방을 꺼내 여유 있게
나가려고 했었나 봅니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대단한 도둑입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코푼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다가 그걸 발견해서
돈을 고스란히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울지를 않았다면?
휴지를 쓰지 않았다면?
쓴 휴지를 정신이 없어서 그냥 버리고 갔더라면?
모시고 다녀와야 하는 많은 여행객의 불편도 심했을 것이고
이 가이드의 인생도 훨씬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기막힌 순간에 남자의 눈물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남자도 울고 싶을 땐 우는 것이 유익입니다.

만약 체면상 울지 못했다면 이런 기적은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순이

4 Comments

  1. 벤조

    2011-07-24 at 21:03

    꽁트같이 재미있는 글.
    남자가 울고불고 코풀고…그러다 쓰레기통에서 돈가방을 찾는다…
    여행업계에서 뼈가 굵었으니 별별 이야기가 많겠지만,
    위기를 당했을 때 우리와 꼭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 아주아주 감동입니다.ㅎㅎ

       

  2. 공군

    2011-07-25 at 01:52

    회장님같은 해외 여행입니다.
    빨리 옮기세요…왜 다 안 옮기지??? ㅋ   

  3. 소리울

    2011-07-27 at 07:49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울어서 행운을 얻었던 경험이야기이군요.
    가이드들의 이야기는 늘 새롭고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있었어요
       

  4. 말그미

    2011-07-27 at 13:54

    참으로 극적인 이야기에 가슴이 서느름 했습니다.
    그런 기적도 있군요.
    가방 분실후의 이야기는 남이 들어도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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