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극장으로 장소를 옮기니

며칠 전 연대음대 졸업연주회에
조카가 라보엠의 마르첼로 역으로 나와서 아람누리 극장에서 봤습니다.
라보엠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무대에 올리는 레퍼토리라 익숙하기도 하지만
특히 조카가 출연하는 오페라를 보는 감동은 남다른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시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깊이 몰입하지는 못했습니다.
동생의 투병하는 병원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무대를 극장으로 옮기니
그도 고통이었습니다.
동생은 아파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나는 오페라가 다 뭐냐 하는
각성이 무대에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이이기도 하고 성격 탓이기도 합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하면서 장면이 바뀌면 마음도 빨리 적응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서 조카의 공연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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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조카라서가 아니라 성량이 풍부하고 멋진 조카의 모습을
무대에 올려놓고 보는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뭇 남성을 유혹하는 술집 여인 무제타를 사랑하는 마르첼로 역의 조카가
무대가 아닌 실제로 좋아하는 연인을 공연이 끝나고 가족과 만난 시간에 소개를 받았습니다.
아름답고 세련된 젊은 예비커플을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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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동창들과 송년모임으로 오페라 라보엠을 보았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50대로 접어드는데 40대 마지막 모임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뭐가 진짜로 아쉬운 건진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 상태들이였습니다.

울 강릉아줌마들은 오페라가 오페라극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체조경기장에서 해서
무대가 너무 산만하고 특별한 감동도 없고 자막도 잘 알아보기 어렵고 미미가 너무 뚱뚱하고 …

등등 그다지 만족한 공연이 아니라는 평 이였습니다.
나도 속으로 우리 동네 돌체에서 보는 공연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보엠 오페라 가사 중에 4막에서 로돌프 친구 콜리네가 돈이 없어서 미미의 약을
사다 주려고 외투를 전당포에 맟기는 대사가 나옵니다.
자신의 외투를 바라보며…
나의 누더기 외투님 들어 보소 이제부터 그대를 전당포에 모셔야 겠소!
내게 고맙다고 해 주시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나의 친구들은 너나없이 가난 이라면 숙명처럼 타고난 시골 아줌마들이라
그대사가 마음에 쏙 들었나(?)나 봅니다.
"프랑스도 1850년대쯤엔 어지간히 가난했었나봐..그러니 낡은 외투를 전당포에 맞기고
돈을 빌렸겠지?"
이러며 자연스럽게 가난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갔습니다.
지금은 다 살만 하고 건전한 중산층으로 자족하며 사는 친구들이라
이젠 가난을 즐겁게 추억합니다.

그런데 내친구중에도 말이 곱지 않아 친구들 대화에 꼭 찬물을 끼얹는 졸부 친구가 있는데
(공무원 하는 친구 면전에서 월급 얼마 받는가 대 놓고 묻는 사람입니다.)
이친구가 나에게 묻습니다.
"순이야 넌 코트가 그것 밖에 없냐?"
" 왜 하나 사 주려고?.. .기왕이면 너 같은 밍크코트 사주렴."
그 친구가 뭔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는 터라 장난으로 말을 막았습니다.
내가 이 코트를 15년째 입고 있어서
겨울에 만날 때 마다 거의 이 코트를 입었나 봅니다.
그러니 의아해 할만도 합니다.
이 친구는 속으로 돈 버는 사람이 왜 옷을 안 사 입고 코트 한 벌로 몇 년씩 나는지
그게 궁금한 것 같습니다.

이 코트는 30대 후반에 입기 시작해서 지금껏 애용하는 겨울 코틉니다
그냥 평범한 검정 모직코트인데 목 부분과 양팔 끝 부분에 털이 달렸습니다.
올해로 15년째 입고 있다 보니 겉감은 그냥 그런대로 봐 줄만 하지만
속감은 낡아서 형편이 없습니다.
주머니도 낡아서 덧대었고 팔 부분의 속감은 말 그대로 너덜너덜 합니다.
안감은 폴리에스테르라 삭아서 맥없이 찢어지기도 하고 바느질 부분이 미어지면서
고쳐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탁소에 속감을 새로 고쳐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속감을 덧대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안 해 봤다며 거절하더군요.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하필 유식한 모임이 많은 연말엔 이 옷 때문에
신경이 쓰입니다.
겉이 괜찮으면 됐지 뭐 속까지 신경 쓰냐 구요?
그게 그렇지만은 않더라 구요.
어디 좀 유식한 장소에 가면 옷을 입구에서 받아 주잖아요?
아마 신라호텔 식당에서 그랬던가?
입구에서 겉옷을 벗어서 두고 식장에 들어가야 해서 나도 벗어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럴 때 벗어 주면서 속으로 좀 찝찝하긴 하더군요.
이런 옷을 입고 이런 델 오나? 그럴까 봐요.
그러면 나올 땐 또 입혀 주잖아요?
그럴 때 그 너덜너덜한 속감이 보여서요 .
친절한 분이 입혀주는 옷에 팔을 끼려다
팔이 떨어진 속감 속으로 잘못 들어가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입이 사나운 친구가 다른 말 더 할까봐
"얘 내가 이 코트 60살이 될 때 까지 입을게 그때 되면 그만 입으라고 해"그랬습니다.
그래도 낡은 코트 전당포에 맞길 형편이 아닌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구요.

이건 딱 십년 전에 오페라 라보엠을 보고 나서 쓴 글인데 생각이 나서 찾아 올립니다.

순이

3 Comments

  1. 벤조

    2012-11-12 at 01:28

    10년전 글 보는것도 재미있네요.
    아직도 그 코트를 입고계신다고 하면…존경합니다!
    무슨 코트를 입건, 그게 지금 순이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안 그래요?
    사는게 다 이런거 가지고 울고웃다가 덧없이 가는겁니다.
       

  2. jh kim

    2012-11-15 at 23:27

    엇그제 1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한국이낳은세계적인 테너 아니 세계무대에서 열연하거나 했던
    그열명을 초청하여 (해외6명 국내4명) 텐 테너 공연을 하였답니다
    그책임을 맡아 몇달을 동분서주하며 기도로준비하여 14잃에는 교회 새성전본당을
    텐테너 열기로 가득 메웠답니다
    동생분 마음에 초청도 않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전화드리기도 마음이 ……..
    힘내세요
    이말씀 뿐   

  3. 리나아

    2012-11-21 at 03:05

    `연명치료,지키지도못할..`…을 읽고나서 이 글을 읽으며
    그 심정이 어떤지…. 알 만 합니다.
    동생분이 고생이 덜 되시길 빕니다. 생각보다 그게(연명포기)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네요…
    아래는 자그만치 10년전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어쨌던 대단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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