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시간만 더 공부하면 니벨룽 반지 전곡을 다 마치게 됩니다.
니벨룽에 나오는 가장 높은 신은 보탄인데
보탄도 잔소리와 바가지 긁는 아내를 못 견뎌하면서도
아내의 바가지가 일리 있음에 듣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의 남편과도 너무나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라고 해도 너무 철없이 행동하다가아내에겐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더군요.
보탄의 아내도 여신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바람기를 불편해하고
남편의 모순된 행동을 지적하고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잔소리 하지만
말 안 듣는 남편 때문에 짜증을 내고 스트레스가 쌓여 살이찌고 늙어갑니다.
그리고 신들도 엄청 질투를 합니다.
보탄과 인간의 아내 사이에서 난 쌍둥이 남매가
서로 좋아해서 지그프리트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막장코드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아무리 막장으로 쓴다고 해도
쌍둥이 남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일은 아직 없었는데
혹시 이런 얘기도 더욱 자극적이기 위해 써먹을 지도 모르겠군요.
어찌 되었든 지그프리트는 무서움을 모르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인물인데
멀리 산꼭대기 타오르는 불길 속에 갇힌 여인을 구합니다.
그 여인은 보탄이 아내 외에 다른 여신에게서 낳은 발퀴레 중
한명으로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벌을 받아
불타오르는 산꼭대기에서 잠들어 있기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그녀를 구하러 갈 자가 없습니다.
용기 있는 지그프리트가 불길 속을 헤집고 그녀에게 다가가
긴 입맞춤 끝에 그녀를 깊은 잠에서 깨웁니다.
어쩌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은 모티브 입니다.
그렇게 깨워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첫눈에 반한 지그프리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의 노래를 둘이서 부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깁니다.
나의 존재가치는 너를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영웅이 한 곳에만 머물 수 없었는지 사랑하는 여인을 불 가운데
홀로 남겨두고 방랑의 길을 떠나면서 수없이 사랑을 맹서합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입니까?
라인 강가에서 만난 어느 왕궁에 초대를 받아가서는
왕궁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금방 반합니다.
그들은 지그프리트가 오는 걸 미리 알았기에
이미 작전을 다 맞추어 놓기는 했지만 그 계략에 쉽게도 걸려듭니다.
사랑의 맹서를 굽이굽이 해 놓고 떠나온 길이라
노래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데 그녀와의 맹서는 까마득하게 잊고
아니 맹세를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새로운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그 오빠에게 산꼭대기 불 가운데 있는 여인을 잡아다 바칩니다.
과거를 잊는 약을 마셨다고는 하지만 그토록 사랑한다던 여인을 직접
잡아다가 딴 남자에게 줘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지그프리트의 모습은
어쩌면 치사하기까지 해서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영웅이다 뭡니까? 찌질한 남자지요.
결혼의 맹세를 깨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 반한 여자를 위해 결혼의 맹서를 한 아내를 잡아다
다른 남자에게 주어 버리다니
이런 헌신짝 같은 사랑을 위해 수 십 분간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약속 했나
의아할 정도입니다.
반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사랑의 약속 증표로 쓰이는데
니벨룽의 반지는 처음부터 저주의 반지라
극의 처음부터 끝가지 거짓말과 배신과 살인을 이끌어냅니다.
반지를 소유한 자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지만
사랑을 할 수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니벨룽 반지는 신의 보호를 벗어난 인간의 자율성을 보여줍니다.
신화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고,
세상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변화해갑니다.
지크프리트 역시 보탄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손자인데도,
하찮은 사랑의 묘약 때문에 굳건한 맹세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배신을 하게 되고
그런 실수를 만회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릅니다.
바그너는 결말에 가서 불을 정화의 수단으로 삼아,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 이런 오류를 통해 파멸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불로 정화되어 새롭게 태어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합니다.
바그너가 27년에 걸쳐 구상하고 만든 곡이라 12시간의 투자를
생색낼 일은 아니지만 북유럽 신화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배치하고
재구성한 방대한 작품 속에 녹아있는 신과 인간의 모습들
그중 실수하는 너무 인간적인 모습들이 정답습니다.
신들도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자멸하는 그런 일들이
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속에 녹아 있습니다.
순이
풀잎피리
2013-07-12 at 05:02
27년의 역작
12시간의 투자
작자와 관객이 다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