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순이 된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남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공무원인 친구들은 올해 아니면 내년으로 퇴직이 예정되어있고
저처럼 아직 현직에 있는 친구도 있어서 나름 다 바쁘지만 여고 동창
모임은 소중하게 생각해서 잘 모이고 함께 여행도 봄가을로 갑니다.

육순 기념이라는 말은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이고
일 년에 두 번 하기로 예정된 여행 중 봄 여행입니다.
그런데 왜 육순기념 여행이냐고 하면 50대었을 때하고 다르고
확실한 노년으로 접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욱 힘내서
열심히 60대를 살아내자는 합의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친구들이 다 젊어 보인다고 하고
젊은 척 하고 살아가지만 속사정은 다 나이답게(?)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앉았다 일어설 때 무릎관절에서는 우두둑 소리가 나고 아구구 소리를
절로 내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서로 웃기도 하고
하루전날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서로 묻기도 합니다.
금방 알아들은 것 같기는 한데 조금 있다가 또 딴소리를 합니다.
그게 내 친구의 일이니까 증상이 비슷한 것에 큰 위로가 됩니다.
나 혼자 관절에서 소리가 나고 아구구 소리를 내고 기억력이 없고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다면 나에게 큰 병이 있나보다 하는데
젊어 보이는 친구들도 60년을 사용한 몸과 두뇌는 연식이 같으면
다 그렇구나 하는 비슷함에서 오는 안도감 입니다.

내나라 남도 여행이라고 하나투어에서 하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박 3일 남도를 여행하는 스케줄인데 특급호텔에서 자고
식사도 그 고장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음식여행도 즐기는
그야말로 노년층을 위한 여행코스입니다.
하나투어에서 외국에 거주하던 분들이 귀국해서 내나라를 둘러보는
그런 스케줄에 맞추어 개발이 되었는데 인기가 좋으니까
이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 3박 4일 코스도 있고
남도 뿐 아니라 강원권이나 부산권 여행 등 다양한 코스가 있다고 합니다.
버스도 우등고속버스처럼 좌석이 넓고 비행기에서처럼 슬리퍼도 주고 생수와 간식도
제공해 주는 등 해외여행 같은 호사를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종로 하나투어 본사 앞에서 출발할 버스를 안내받아 친구들과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뒤적이던 옆에 친구가 "내가 약을 다 가지고 왔나?"
하면서 약상자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장난감처럼 생긴 조그만 플라스틱 속에 약들이 귀엽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약이야?” 라고 물었더니
소화제 두통약 감기약 관절약 등등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멀미약 일회용 반창고, 건강보조제 등 다양하게 가지고 왔습니다.
"참 약들도 다양하게 먹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친구의 약통을 보고 웃은 복수는 여행기간 내에 금방 당했습니다.

변산반도에 가서는 바지락 한상차림을 먹고
목포에서는 녹차에 밥을 말아 굴비를 얹어 먹고
남도 한정식을 먹는 등 하루 세끼를 풀코스로 먹고 났더니 배탈이 났습니다.
위에서 완전히 과부화가 걸린 것입니다.
대게는 아침엔 커피나 한잔하고 과일 이나 먹고
하루 한 끼 정도 점심이나 저녁을 잘 먹고 나면
그 외에는 식사를 간단하게 먹기 마련인데
세끼를 완전히 풀코스를 먹는 것은 거의 고문수준이었습니다.
그러면 안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습니다.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고 친구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데
식탁에 까지 앉아서 혼자 안 먹는 다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내 식탐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주는 대로 맛있게 먹고 났더니
그걸 다 소화시키지 못한 위장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입니다.

배탈이 난 것을 안 친구들이 소화제를 꺼내 주기도하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하고 손을 따주기도 하고, 깊이 넣어가지고 온
원광대병원 한방과에서 특별히 만들어 먹는 다는 한방 소화제도 주었습니다.
친구들이 주는 대로 약을 받아먹고 위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예비로 약을 준비해가지고 간 덕을 톡톡하게 봤습니다.
약 먹는 일이 잘 없는 나로서는 비상약을 준비해 다니는 일을
과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럼 약을 얻어먹으면서 약 때문에 곤란만 겪었나 하면 그건 아닙니다.

평생 약(주사약 포함)하고는 친하게 지내는 직업 탓에
여러 사람의 시간을 절약해 주기도 했습니다.
목포 현대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전 출발시간에 되어 차에 오르려는데
어떤 아줌마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당황해서 가이드를 붙잡고 뭐라고 합니다.
콜택시를 불렀다는 소리를 들으며 버스에 올랐는데
서른 명의 탑승객중 가장 고령인 74살 되신 할머니가
당뇨 주사를 못 맞아서 쩔쩔매다가 병원을 다녀오겠다고
콜택시를 부르러 막내 올케가 뛰어 내려 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4살 된 분은 여동생과 올케 두 명을 데리고 여행을 나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비만한 체형으로 혈압과 당뇨가 있어 보였습니다.
걸음도 잘 못 걸어서 여동생과 올케들의 부축을 받았습니다.

버스 뒤쪽에서 인슐린 주사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고 내리자고 하면서 불안해하는
소리가 들려서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가 봤습니다.
아침에 인슐린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주사기가 고장 나서 못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인슐린 주사기를 내가 봐 주겠다고 했더니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워했습니다.
인슐린 주사기를 보니 주사침을 보호하는 플라스틱 캡을 뽑지 않고
약을 재려니 숫자판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새로 주사침을 달라고 해서 꼽고 몇 단위를 쓰냐고 물어서 숫자를 돌려
알콜로 배 부위를 소독하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2~3분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주사를 놓고 "다 됐습니다." 했더니 버스 속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습니다.
나를 향한 박수에 어찌나 민망하지 몸 둘 바를 몰랐지만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환자분은 옷을 추스린 후 나에게 다가와 고맙다며 악수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약이나 주사를 다룰 줄 아는 나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대단해 보였나 봅니다.
6~70대 아줌마들이 우리 친구들에게도 감사해하면서
우리 일행이 다 멋있게 보인다는 말도 했습니다.

만약 무슨 일인지 관심하지 않았다면 그 일행이 병원을 다녀오는 시간동안
출발하지 못하고 버스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30명의 여행 스케줄이 늦어지지 않고
제시간에 진행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가이드의 인사말도 있었습니다.
74살 된 분은 집에서 인슐린주사를 스스로 맞는 사람인데
여행지에 오다보니 간단한 일의 순서를 빼먹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습니다.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고는 하루 스케줄을 시작할 수 없는 당뇨환자의 애환이지요.
어찌 되었든 직업상 타인을 도울 수도 있었고 친구들의 비상약을 얻어먹으며 다닌 것을
보면 약은 우리 일상에 멀리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여행이 알차고 편안하고 즐거워서 이야기가 무궁무진한데
시간이 되는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