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 아이 된다고 하더니 잘 삐치시는 어머니

“수니야 대구 좀 와야겠다.”
휴대폰이 울려서 받자 오라버님이 내 사정은 묻지도 않고 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말엔 어머니 뵈러 가려고 합니다.” 라고 했더니
그게 아니고 지금 오라는 겁니다.

모처럼 주중에 쉬는 수요일이라
한이는 어린이 집에 가고 출산을 두 달 남겨 두고 있는 배부른 임산부 작은 딸과
거실에서 고구마를 구워 차를 마시고 있느라 안방에 둔 휴대폰에 카톡이 온 것을몰랐습니다.

오라버니가 가족들이 쓰는 카톡으로 연락을 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으니 다시 전화를 한 겁니다.
동생들은 수업중이라 카톡을 확인도 못하고 있었고 나도 반응이 없자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전날 저녁부터 식사를 하지 않고 계셔서
딸이 내려와 어머니 심기를 달래서 식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오라버니는 목요일에 해외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 잡혀 있어서
출국을 해야 하는데 식사를 안 하시는 어머니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왜 식사를 안 하시냐고 했더니 뭔가 삐치신 것 같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어머니가 지난 저녁부터 굶으셨고 점심때 연락을 받았으니
만 하루를 굶으신 것이라 비상사태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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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세수도 안하고 느긋하게 있다가 전화를 받은 시간이 오후 1시 10분
딸에게 행신역에서 출발해서 대구 가는 KTX 를 알아봐서 가장 가까운 시간에 열차표를
구해 달라고 하고는 세수부터 시작해서 머리는 못 감고 초스피드로 옷을 주워 입고
콜택시를 불러 타고 행신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10분입니다.

인터넷으로 차편은 검색이 되는데 출발 직전에는 전산으로 차표 예매가 안되고

행신역으로 나가서 살 수 밖에 없다고 해서 차표도 없이역에 간것입니다.
2시 15분 기차를 타려면 5분 안에 티케팅과 열차에 승차를 해야 해서
계단을 숨이 차게 뛰어올라가 차표를 끊고 열차 승차장까지 달려가는데

행신역사와 열차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긴 통로와 계단을 뛰어서 내려갔습니다.
출발 30초 전에 열차에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아앉기도 전에 열차가 출발을 했습니다.
차량을 확인도 안하고 계단에서 내려 바로 옆 열차 칸으로 올라탄 일이라
여섯 칸 정도를 건너고 또 건너고 해서 겨우 내 자리를 찾아서 앉고 보니 좌석이 역방향입니다.
그래도 열차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더군요.
자리에 앉자 나처럼 굼뜬 사람이 이렇게 스피드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 조차 했습니다.

전화를 받고부터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행신역까지 30여분 택시를 타고 가서

열차에 승차하기까지 한시간만에 해결을 했으니 대단하잖아요? ^^
열차에 앉아서 "큰딸이 갑니다."이렇게카톡을 보냈더니
오라버니가 환영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오라버니는 효자 아들이라 어머니가 식사를 하지 않는 상태로는

견딜 수 없어서 바쁜 중에도 안절부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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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가 온다고 오라버니가 미리 말씀을 드려서인지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계셨습니다.
일산에서 대구까지 먼 길을 헐레벌떡 달려가면서 어머니가 어디 아프신가? 걱정되고
아니면 이불을 눌러쓰고 등을 보이고 누워계실 것 같았는데
일어나 외출복까지 챙겨 입고 계셔서 반가우면서도 어쩐 일인가 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풀린 어머니가 오라버니에게 왜단식을 하는지 말씀을 하셔서
오해가 풀리셨다고했습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텔레비전을 보려고 했는데 텔레비전에서 화면이 안 나오고
“신호 없음 " 글자만 자꾸 나오더랍니다.
이리저리 해 봐도 안 되서 다음 날 다시 보려고 해도 또 안 되고 하니까
어머니 혼자 생각에 신호가 없다는 것을 보니 텔레비전을 못 보게
케이블을 끊었나 보다 이렇게 오해를 하시고는 단단히 삐치셨던 겁니다.

내가 텔레비전 보는게 미워서 그랬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하신거지요.

텔레비전 리모컨 작동이 복잡하잖아요.
사실 나도 리모컨 사용을 잘 못해요.
지상파 채널이 있고 케이블이 있고 DVD가 있고 여러 채널이 있는데

오라버니가 어딘가에서 강연한 것을 누가 CD로 만들어 보내왔기에 그걸 잠깐 보고는

TV채널로 복귀 해 놓는 것을 깜빡하신 겁니다.
오라버니는 사무실이 따로 있으니까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 거의 없고
어머니 전용이다시피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겁니다.
새언니도 교회 김장 등으로 바빠서 잘 몰랐다고 하구요.

“텔레비전이 안 나오면 고쳐봐라 그러시지 그게 뭐 단식까지 하실 일입니까?”
어머니께 따졌더니
어머니는 “늙어서 그런지 그냥 자꾸 서운함 맘이 든다.”고 하시며 웃으십니다.
“주말이면 어머니 뵈러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허겁지겁 오면 나도 힘들어요
엄마 딸도 이제 환갑노인이야. ㅎㅎㅎ “ 라고 엄살을 피웠더니
같잖으신지 웃으며 쳐다보십니다.
“엄마는 좋겠다. 자녀를 많이 두셨으니 이렇게 달려오는 딸도 있고
삐칠 아들도 있고.. 난 딸만 둘이라서 어디 응석 부릴 때도 없네….“

이런 말을 했더니

"그러니 아들을 한 명 더 낳았어야지, " 이러며 대번에 동조를 하십니다. ㅎ

오라버니 내외와 어머니 모시고 나가 저녁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 지셨고
오라버니도 어머니를 달래놓고 해외에 다녀오시게 되어 홀가분해 했습니다.
덕택에 나는 어머니 옆에서 하루자고 목요일 근무를 위해
새벽부터 케이티엑스를 타고 행신역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 점점 더 숨이 차게 대구를 가는 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그나마 케이티엑스가 있어서 행신역에서 출발하면 2시간 15분 남짓이면
대구에 도착할 수 있어서정말 편리합니다.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고 삐치셔서 단식까지 하시니
우리 어머니도 연세가 드시긴 드셨나 봅니다.
경우 바르고 당신은 어찌 되었든 자녀들만 위하고
굶어가면서도 자식을 먹이려고 하셨던 어머니께서
이젠 잘 삐치시는 아이가 되셨습니다.
돌아 오는 길, 동대구역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께서
차비하라고 저에게 3만원을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순이

5 Comments

  1. mutter

    2014-11-21 at 04:15

    나이 들면 삐치나 봐요.
    그냥 넘어갈 일도 자격지심에 더 한 것 같아요.
    저도 그럴 나이가 되서 ..
    저는 아직은 삐치지 않는데 가끔 할배가 삐치는 것 같기도 하고.
       

  2. 말그미

    2014-11-21 at 17:37

    대구까지 어머니께 다녀오셨군요?
    잘 하셨어요.

    삐치셨어도 사랑하고 이쁜 따님 만나면
    만사가 OK입니다, 어머닌…
       

  3. 노당큰형부

    2014-11-22 at 10:25

    쿡~~

       

  4. 벤조

    2014-11-22 at 16:50

    왜 삐치셨는지 말씀하시는 걸 뵈니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허겁지겁 놀라서 달려가시긴 했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가끔씩 그러셔야 자식들이 좀 더 신경을 써주겠지요?
    저 부터도 어머니께서 잘 계시려니 하면 전화도 뜸해져요.
    순이님 형제분들이 다 효자시겠지만, 대체로 어머니들이 맏딸 말을 잘 듣지요.
    해피앤딩!ㅎㅎㅎ
       

  5. jh kim

    2014-11-27 at 12:14

    왜이리 눈물이 흐르는지요 ?
    삐지시더라도 단열흘만 살아 오실수 있으시다면…………….
    담요를덥으신 어머님을뵈오니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네요
    누가볼까 ?
    평생 효도한번못한 이 불효자………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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