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오래전 영화 레옹의 포스터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비슷한 이미지의 가수가 겨울 나그네를 부른다고?

“더 이상의 겨울 나그네는 없다”고 하는 아람누리 광고에

나오는 가수가레옹과 비슷하여 조금 어색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로 익숙한 탓에
그분의 목소리로 들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봅니다.
추운 겨울이면 한두 번 정도 겨울 나그네 전곡을 들으면서
인생의 깊은 우울과 쓸쓸함 그리고 외로움을 느껴봅니다.
인생이 쓸쓸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우울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 속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괴로움과 우울로 인하여
“슬픔은 슬픔으로 위로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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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영화포스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종로 1가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보리수제과점”이 있었습니다.
40년 전에는 젊은이들이 주로 명동이나 종로에서 놀 때라
약속장소를 잡기엔 보리수제과점이 좋았습니다.
그 근처엔 르네상스라는 클래식음악 감상실이 있었기에
보리수제과에서 친구를 만나 오렌지 주스라도 마시고 르네상스에 간 날에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신청하여 들었습니다.
단지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이런 노랫말을 안다는 이유였고
보리수제과를 거쳐 왔기에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보리수~ ^^
그 그늘 아래에서 단꿈을 꾸었고 보리수 밑동에 숱한 사랑의 말을 새기며
사랑을 속삭였을 여인들을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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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왕이라는 불리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는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여인의 집 문에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써 넣고
이별을 위해 혼자 눈과 얼음으로 얼어붙은 겨울 들판 속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노래는 시작합니다.

1.안녕히 주무세요 (Gute Nacht)

사랑을 잃은 청년은 연인의 집 문에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써넣고 먼 길을 떠난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난다.

5월은 아름다웠네. 그녀는 내게 사랑을 말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제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차고 길은 눈으로 덮혀 버렸네 …… 네 꿈을 깨트리지 않도록,

네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며시 문을 닫는다.

지나는 길에 네 집 문 앞에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적으리라.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언젠가는 알 수 있도록"

편지도 아니고 왜 연인이 사는 집 대문에 낙서를 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그 남자는 아주 소심한 성격의 사람인 듯합니다.
그래서 작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인으로 부터 멀어졌겠지요.
요즘 같으면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낙서하고 떠나겠습니까?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 집에 들어가 "지금 잠이 오나요?"라고 말하며
연인이 깊은 잠을 자고 있더라고 깨웠겠지요.
아니면 밤새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했겠지요.
추운 거리를 헤매다가 청년은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까마귀 숙소(묘지) 환상 도깨비불 같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을 어귀에서 손풍금을 돌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비슷한 처지의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과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말을 건네는
것으로 겨울 나그네 24곡이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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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페드모어라는 영국 가수의 목소리가 맑고 청아했습니다.
이층에서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울림이 크지는 않았고 작고 맑게만 들렸습니다.
비탄의 느낌 보다는 아름답고 고요한 목소리를 듣자니 졸리기도 했습니다.
내 옆의 관객도 그 옆에 앉은 여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졸고
내 앞에서도 고개가 뒤로 깜빡 깜빡 넘어왔습니다.
나도 직장 회식이 오후 다섯 시부터 있어서 삼겹살을 구워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간 길이라 어느 순간 잠이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아람누리에 도착해서 겨울 코트를 벗을까 하다가 그냥 입고 앉았더니
식곤증에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노래 소리는 아련히 들리고 졸음이 몰려와서
자주 머리를 흔들어 잠을 털어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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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 사인을 하고있는 마크페드모어와 피아니스트 )

겨울이고 혹독하게 날이 추워서
"겨울 나그네"가 제 맛으로 들리겠구나 했는데
난방이 잘된 공연장에서 두꺼운 코트를 입고 앉아서
겨울 나그네를 듣는 것은 고문이었습니다.
기대를 하고 간 공연이었지만 회식 후 배가 잔뜩 부른 상태라서
겨울 나그네를 겨울 나그네로 듣지를 못하고 자장가로 들었습니다.
춥고 배고픈 날 겨울 나그네를 다시 들어야 하겠습니다. ^^

순이

3 Comments

  1. 지나

    2014-12-12 at 17:11

    좋은 연주회에 다녀 오셨습니다

    마크페드모어 의 피아노 반주를 하신 Paul Lewis 는

    바흐음악 연주를 많이 하시더라구요…제가 좋와하는 피아노 연주자 입니다

    늘 순이님의 따뜻한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 벤조

    2014-12-12 at 17:54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쓸 낭만?도, 써 놓을 공간이 없지요. 요즈음은.
    마음이나, 집앞에나. . .
    아, 우리집에는 자리가 있는데, 그걸 쓸 사람이 없군요. 흑.
    말씀대로,
    ‘겨울 나그네’는 추워야 제대로 들릴것 같아요.
    이번에 자동차로 딸 집에 올라갈 때 들어볼까 했는데,
    남편이 운전하며 졸면 어쩌나. . .
       

  3. 소리울

    2014-12-15 at 15:55

    이야기를 알고 들을 때 더 잘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라클럽에 오신 손님 중에 그걸 틀어 달라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 카페에 컴퓨터 스피커로 들려 드린 적이 있어요.
    소년시절의 낭만을 생각하며 그걸 찾아 들려 달라고 해서 혼이 좀 났었지요
    좋은 공연 서울 사시니 더러 즐기셔서 좋겠습니다. 그게 전 늘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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