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생신날!
새해도 되고 해서 형제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어머니께서 80대에서도 후반으로 접어든 연세이다 보니
생신이 돌아오는 것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키가 크셨는데 어느새 나보다 목 하나는 작아지셨습니다.
전에 입던 한복을 입으시려면 한 뼘 씩은 줄여서 입어야 합니다.
나이 들면 골밀도가 소실되어 키가 저절로 줄어들어서 그러나 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한 뼈도 줄어드는데 뇌세포도 그러겠지요.
1박 2일 어머니 생신모임엔 짧은 시간이지만
미역국을 끓여 아침 먹고
목욕 좋아하시니 모시고 온천도 다녀오고
점심은 모든 형제가 한식집에서 모여 생신축하 하고
어머니와 함께 “국제시장” 영화까지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했습니다.
아침을 이르게 먹고 대구도심에 있는 “생활온천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연세가 있으셔도 깔끔하신 분이라
늘 깨끗이 씻으시고 목욕하는 것을 즐깁니다.
딸이 함께 가지 못할 때는 올케가 모시고 목욕을 다닙니다.
대구에는 생활온천이라고 해서 독립된 건물의 큰 온천장이 있더군요.
샤워를 하고 났는데 미끌미끌하여 비눗기가 덜 빠졌나 해서
여러 번 헹궈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온천물이 좋았습니다.
어머니 등을 밀어드리고 자매들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기도 하면서
노천탕에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온천 후에는 오라버니가 미리 예약해 둔 한정식 집에 모였습니다.
식사 전에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신축하 노래를 불러드렸습니다.
어머니께 증손이 되는 한이가 생신축하 노래를 부른 것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가지고 간 것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기도 했습니다.
케이크에 10년짜리 초 8개, 1년짜리 초 6개를 빽빽하게 꼽는 것을
보고 있던 식구들 중 누군가가 10년짜리가 아니라 오십년을 상징하는 초가
있어야 하겠다고 말을 꺼내자 촛불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즉석에서 나왔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나이 숫자대로 초를 켤 것이 아니라 초를 하나만
켠다든가 50년짜리 초를 만든다든가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생일날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축하노래를 부른 후 생일 당사자가
입으로 불어 촛불을 끄는 세레모니는 우리 생일문화에 자리를 잡았는데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초를 나이만큼 꼽는 일이 점점 부담이 되고
촛불로 나이를 읽히는 일이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생일 축하 촛불의 간소화 ^^ 를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는 케이크 위의 촛불이 많아질수록 기분이 으쓱했지만
어느 때 부터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면서 촛불의 숫자를 물어올 때도
머뭇거리게 되고 유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어머니 생신이나 육십이 넘은 형제들의 생일에는
케이크 위에 초 한개만 꼽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
100세 시대라 촛불이 주는 상징성도 달라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국제시장이 화제가 되고 있어서 여러 번 영화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영화는 어머니랑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껴두었다가
세자매가 어머니 모시고 "국제시장" 영화를 봤습니다.
고생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면 어머니는 영화에 흥미가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영화였지 어머니를 위한 영화는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 자매는 감동을 받고 울어서 훌쩍거리며 영화를 봤지만
어머니는 별 감흥이 없고 "뭔 영화가 이러냐?" 그러시더군요.
약간의 인지장애가 있어서 인지 과거와 현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혼란스럽고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건강하게 생활하고 계셔서 치매가 왔다는 것을 못 느끼다가
영화를 이해 못 하시는 것을 보니 뇌세포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흥남부두의 철수장면만 공감을 하셨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사시면서 경북 봉화까지 겨울피난을 다녀오고
피난 중에 홍역에 걸린 첫 아들을 잃은 아픔이 있는 어머니는
등에 업었던 동생을 잃은 달수나 그 어머니가 이불 보퉁이를 이고 아이를 업고
그렇게 피난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해를 했지만
그 외의 파독 광부와 월남파병 같은 일들은 흥미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거란 기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을
늦춰가면서 영화를 봤는데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그 시대이야기가 "토 나온다."고 할 정도로
거부감을 유감없이 토로 했지만 난 파독 간호사 이야기는 내 친구 얘깁니다.
지금도 독일에 간호사로 갔다가 거기서 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이렇게 시작하는 “맹호부대 용사"나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는 그 기백 총칼에 담고 ~
이런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살았고 월남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쓴 세대라
더없는 공감을 했습니다.
집에 온 다음날 여동생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국제시장을 보면서 오빠와 큰언니의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닌오빠와 나의 삶이 동생들에게 이해받는 영화였다니…..
저도 오라버니를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라버니는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는 효자라서 그런지, 직업이 그래서인지
얼굴엔 늘 온화한 기운이 있습니다.
어머니 생신에도 더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유순한 사람이라 동생들에게도 서운한 말이나 야단을 치거나 큰소리 내지
않지만 우리는 그런 오라버니의 권위에 말없이 순복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많은 동생들을 거둔 우리 오라버니는
이시대의 또 다른 덕수입니다.
순이
TRUDY
2015-01-12 at 21:56
어느 평론가인지 참 이해 안되는 평인데요.
아마 그세대를 모르고 자란 젊은이였나 봅니다.
그렇긴 해도 평이 너무 무지하네요.
영화평할 자격이나 갖추었는지도 궁금.
이곳 켈리포니아에서도 엇그제 토요일날
40분 운전하고 가서 봤지요. 울리 않으려고 앙 다물고
있었지만 이상가족 찾는 장면에서 본의 아니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더군요.
저도 독일 간호사로 보내겠다는 얘기가
있었던 시절이이요, 월남 파병때는 부산 부두가로
학교에서 단체로 잘 싸우고 돌아오라며 환송을 가기도..
따뜻한 가족분위기가 부럽습니다.
풀잎피리
2015-01-13 at 05:29
어머님 생신 멋지게 보내셨네요.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의 흐뭇함
추운 겨울 따뜻한 이야기 참 좋습니다.
해군
2015-01-16 at 05:32
영화를 보면서도 편가르기 하는 상황이 안타깝지요
생일케익 초도 돈처럼 여러 단위를 만들면 편하겠군요
1,5,10,50…
영화, 제 나와바리까지 들어오셨네요 ㅎ
騎士
2015-01-17 at 01:38
짧게 씁니다
잘 쓰셨습니다
황성옛터
2015-01-20 at 23:49
저도 신문에 그런 평도 있길래,
좀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니더군요.
무슨 이념이나 이런 거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영화.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이 영화를 먼저 본 딸이,
그런 고생 없이 자랐고 그런 일을 겪지 못한 세대임에도
많이 울었다고 해서 약간 놀랐습니다.
참으로 어떤 평론가인지,
그런 비딱하고 배배꼬인 심보로 어떻게 객관적인 평론을 한다는 것인지.
뭐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으니, 일부 이상한 인간도 있구나 싶지만,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평론가라니 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