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약 먹는 일에도 자괴감을 느끼는 장수노인

직장의 상사이기도 하고 제가 존경하는 부장님이 있는데
그분의 외할머니가 97세입니다.
97세의 연세에도 인지기능이 여전하시고 건강도 좋으십니다.
할머니 키는 자그마하신데 허리도 꼿꼿하고 몸에 군살이 없어
아담하고 단정하고 귀여운모습입니다.

외할머니! 얼마나 정다운 호칭입니까!
부장님은 병원 카톡에 가족들이 모여 김장할 때
할머니가 김장 거드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기도 하고
외할머니가 밭에서 일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해서 부러워했습니다.
장수하는 분들이 대게 그러시듯이 성품이 긍정적이고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하고 소식하고 사랑이 많습니다.
우리부장님도 오십대 중반의 연세인데 외할머니가 살아계셔서
함께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우리 병원에 할머니 친척이 입원해 계셔서 병문안을 오셨는데
누구에게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소녀 같이 예뻤습니다.
첫 외손녀인 우리부장님은 외할머니와 멀지 않은 근처에서 이웃해 살아서
맏손녀라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다고 합니다.
외할머니와 돈독한 관계를 50년 넘게 유지하고 사는 것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부장님은 나에게 늘 외할머니 자랑을 하면서 사진도 보여주고
외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을 행복해했는데
요즘 들어 외할머니가 너무 불쌍하다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할머니가 불쌍한 이유는 할머니의 아들이 큰 병이 나서 입니다.
우리 부장님의 외삼촌 되시는 분이 70대 초반이신데
전이된 대장암이라 항암치료를 받으면 30개월 정도 살고
치료를 포기하면 3개월 정도 밖에 못 사신다고 병원에서 말한답니다.
지난 가을에도 외삼촌이 하는 농장에 직원들이 여러 명 놀러갔었는데
커다란 무쇠 솥뚜껑위에다 직접 고기를 구워주셨고 농사지은
상추 오이 토마토 등을 양껏 먹게 해 주시는 등 인정스럽고
선량하고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외삼촌에게 말기암 진단이 내려지자 환자도 걱정이지만
연세 높으신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까봐 그걸 더 걱정했습니다.
외할머니께는 "간이 나쁘다." 정도로 말씀 드렸지만
오래 사신 어른들은 경험상 감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파도 약도 안 드시고 오래 산 것을 괴로워하신다는 겁니다.
전에 같으면 감기나 어디가 아픈 것 같으면 병원에 모시고 가서 링거도
놔드리고 약도 얼른얼른 지어드리고 했는데
외삼촌이 아픈 상황에선 외할머니를 위해 그런 일을 하기엔
할머니 본인이 강력하게 사양하고 자녀들 입장에서도 뭔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총기 좋은 할머니께서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씀도 안하시고
자녀들 눈치를 보셔서 갑자기 눈치꾸러기,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다며
할머니가 몹시 불쌍해 지셨습니다.
집안에 어른으로서 존경받고 사시다가 갑자기 오래 사는 것이
스스로 부담이 되고 왠지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 할머니 스스로
괴로워하신다는 겁니다.
아들은 아픈데 90이 넘어서 식사를 잘하는 것도, 아파서 약을 먹는 것도
다 편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 살아서 이런 험한 일을 보나…….. 하는 생각에
할머니께서 괴로워하시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장수하는 어른을 모신 집안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자손들도
할머니를 두고 외삼촌이 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할머니께나 외삼촌께나 다 불편한 일이 되었습니다.
부모 앞에 자녀가 먼저 가는 일…….
정말 참담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딸이 중한 병에 걸렸다고 하니
건강하시던 분이 인지기능이 급작스럽게 확 떨어지시더군요.
딸이 아픈 것을 보는 일이 너무 괴로우셔서 그런 방어기전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가 봅니다.
동생이 백혈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손목터널증후군으로 양손을 모아들고 손목만 들여다보며
아프다고 고장 난 레코드처럼 하루 종일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동생이 아픈 중에도 어머니 손목터널증후군 수술을 양쪽 다 하고
병원에 입 퇴원을 반복하느라 2012년은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 어머니께서 동시에 입원해 계실 때도 있었으니까요.

부모와 자녀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데
한쪽이 병들면 같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병들자 자괴감으로 자신을 방치하는 것으로 자학 하는
연로한 어르신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 그 고통이 느껴집니다.

아들이아픈것을 알고,밥 먹는 일도, 약 먹는 일도 떳떳해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눈치를 보면서 오래 사시는 것을 괴로워하시니

그 상황을 지켜보는 가족 친척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순이

4 Comments

  1. mutter

    2015-01-14 at 06:11

    우리동네 96살쯤 되신 할머니.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나니 같이 살던 며느리와 손녀가 할머니 곁을 떠나
    어디 사는지도 모르십니다. 딸이 셋이 있는데 큰딸이 유방암에 걸리자
    ‘내가 오래 살아서..’ 하시면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집에
    찾아가 위로 하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딸은 유방암 치료를 하며 몇년째 살고 있습니다.
    막내딸이 할머니 혼자사시는 것이 안타까워 사위와 함께 할머니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딸이 3년차 되는 작년부터 무슨병인지 걷지를 못해 지팡이를 집고 걷더니
    요즈음은 휠체어를 끌며 걷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 딸을 쳐다보고 계십니다.
    사위가 직장을 못나가고 할머니와 따님의 식사를 챙기고 있습니다.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2. 데레사

    2015-01-14 at 09:21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알것 같습니다.
    생전에 그런 일은 안 당해야 할텐데 사람의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어야죠.

    저도 마음이 아파지네요.
       

  3. 이영예

    2015-01-14 at 10:00

    장수가 축복은 아니군요 그걸 마음대로 할수없으니~~~   

  4. 솔이울/유인걸

    2015-01-14 at 20:29

    자식이 먼저 죽는것을 참척이라고 하는데 인생의 가잔 고통으로 생각합니다.97된 할머니게서 얼마나 괴로우실까. 나의 아버님은 내동생을 먼저 떠나 보내시고 글을 쓰셨는데 교과서에도 아옵니다….신이여 거듭 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라고 외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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