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는 직장에서 밀어내도 나오면 안 된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는데 길가에 있는 약국에서
어떤 남자가 나오다가 멈칫 하더니 인사를 합니다.
나도 인사를 하긴 했는데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약국을 할 때는 단골들의 집 식구들과 나이 등 별 사소한 것도 다 기억이 되었는데
나이 탓인지 이젠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서 어느 땐 스스로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누군가 생각을 해 내야하겠기에 내가 곤란해서 머리를 갸웃거리자
남자분이 얼른 명함을 한 장 꺼내 나에게 건넵니다.
00 제약회사 부장 심00 이렇게 쓰여 있는 걸 읽고서야 누군지 생각이 났습니다.
제약회사 직원으로 오래전에 우리 약국을 드나들던 분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방문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와 거래를 할 때는 30대었는데 이제는 50대 초반의 중년남성이 되어있었습니다.

최근에 우리가 했던 약국에 와 봤던 듯
왜 약국을 안 하느냐고 묻고, 나에게 지금은 뭐하냐고도 물었습니다.
해산한 딸아이 병원에 들려야 하겠어서 시간이 없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나중에 보자고 했더니
할 이야기가 많다며 잠깐만 차 한 잔하고 가자고 해서
뿌리치고 지나오기가 곤란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대강 나의 신상변동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제가 이 나이에 외근을 다닙니다." 이러면서요.
그분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제약회사에 입사를 했답니다.
제약회사 외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신입시절에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젊을 때 힘들어도 열심히 하자 해서 경험도 쌓고 경력도 쌓여서 대리에서 과장으로
차장으로 순조롭게 진급도 되어 이 회사에다 뼈를 묻으리라 각오하고
이직이나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본적도 없이 회사에 만족하고 다녔답니다.
그러나 불황 때문인지 제약회사 규제가 심해지고 매출이 줄어들어서
감원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랍니다.
회사에서 이유 없이 감원하기는 어려웠는지 지방으로 발령을 낸다든가 부서 통폐합을
이유로 책상을 치우든가 해서 스스로 못 견기고 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심부장의 집도 서울인데 뜬금없이 창원으로 발령을 내더랍니다.
그건 회사에서 나가라는 소린데 사표를 내려고 보니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선뜻 사표를 낼 수 없더랍니다.
우선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있어서 한참 더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해야 하는데 다른 업무를 할 자신이 없고
새로 시작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50대 남자를 받아줄 회사도 없더랍니다.
그렇다고 치킨집이나 분식집을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자본이 없어서
미적 거리다 창원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 회사 일만 열심히 했답니다.
12개월 쯤 후에 서울 본사로 부르기에 이젠 안심하고 회사를 다니겠구나 했더니
회사 내근 직이 아니라 외근을 하라고 하더랍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한심하고 사표를 낼 수밖에 없도록 압박하는 것으로
모멸감에 견딜 수가 없고 잠이 안 오더라는 겁니다.
젊을 때야 외근을 다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지만
쉰이 넘은 남자가 약국마다 다니며 외판을 한다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버틸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서
굶어 죽더라도 사표를 내자 이런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나간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표를 내고 나오니 더 힘들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특별히 벌어 논 것도 없고 주특기도 없어서 이 회사 아니면
어디 가서 밥벌이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버티자 하는 각오로
외근을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자가용도 없애고 버스타고 걸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데 버스로 몇 정류장 정도는
쉽게 걸어 다닌다고 합니다.
실적 압박을 받는 스트레스 외엔 답답한 사무실에 근무할 때 보다
훨씬 좋다고 스스로 위로하곤 한답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니까 우선 건강이 정말 좋아졌답니다.

고지혈증이 있어서 약을 먹고 있었는데 최근에 검사를 받았더니 혈액수치가
정상이라서 약을 안 먹어도 된다며 의사가 비결을 묻더랍니다.
내근 직에서 쫓겨나 외근 직으로 매일 걸어 다니니 좋아졌다보다 했더니
좋은 일이라고 잘 되었다고 말하더랍니다.
뱃살을 빼라고 하고 심근경색이 올 수도 있다고, 운동하라고 의사가
매번 경고를 했는데 듣지 않다가 외근을 하면서 돌아다니니까
건강도 좋아지고 얼마나 좋으냐고 사표내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하더랍니다.

사표를 내지 않고 열심히 하니까 회사에서도 자기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며
아이들 학자금도 나오고 연봉도 높고 한데 울컥해서 사표를 냈더라면
어쩔 번했냐고 만족하고 있다고 말은 하는데 조금은 쓸쓸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있다며 열심히 발품을 파는 심부장이
오십대 우리나라 가장의 대표적인 모습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버티기, 그러나 즐겁게 적극적으로 버티는 힘이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결국 회사에도 유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잘 견딘 본인이 대견하다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열심히 하시라고 격려의 악수를 나누고 헤어져 오면서
내가 슬픈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쁜 이야기를 들었는지 구별이 안 되었습니다.

다행인 것 같기도 하면서 자존심을 버리고버티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50대 가장의 슬픈이야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순이

4 Comments

  1. 김준영

    2015-01-30 at 10:49

    차세대 먹거리를 선정하지 못했고,민주화 이후 곤두박질 치는 경제성장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대통령들에게 앞으로는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고싶다.   

  2. 연담

    2015-01-30 at 12:08

    또 한분의 국제시장 아버지시네요.
    내 남편 이야기 같기고 하고 내 아들 이야기 같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 맞네요.   

  3. 벤조

    2015-01-30 at 23:33

    돈 쓰며 운동하러 다니는데 돈 벌며 운동하니 얼마나 좋아요!
    저는 기쁜 쪽에 한 표!    

  4. trio

    2015-01-31 at 14:44

    형편따라…가족들이 달려있으니…그래도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는 자녀들… 그 누구보다도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그런 분이 더 많으면 이 사회가 좀 더 밝아질텐데…
    권위나 내세우는 사회가 아니고…
    항상 뭔가 생각하게 하는 유익한 글…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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