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쓸쓸한 날에 위로가 되는 라면 한그릇

한이 엄마는 산후라 조리원에 있고 한이 아빠도 조리원에서 밥을 먹고 다니고
한이는 본가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놀고…….
그러다 보니 저녁에 혼자 밥을 먹게 되는 일이 며칠 있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 일은 차라리 굶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쓸하고 우울했습니다.
사부인이 반찬을 가지가지 해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었지만
나를 위해 밥을 차리는 것도 도무지 귀찮고 식욕이 나지 않았습니다.

평소엔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식탐도 많아서
그득하게 차려진 음식상을 받으면 기분부터 좋아지고 배부르기 전에
우선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한 마음이 들면서 즐겁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왠지 모르게 식탐이 좀 줄었습니다.
음식이 많이 차려진 상을 보면 저걸 다 어떡하지?
하면서 많이 차려진 음식에 부담이 들곤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기대보다 걱정이 되는 것이 무슨 조환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입맛이 없느니 밥맛이 없느니 할 때
나는 어쩌면 밥맛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맛있는 것을 놓고 왜 고민들을 할까? 그랬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먹고 잘 먹습니다. ^^

저녁을 굶고 잘까 하다가 라면을 하나 오랜만에 끓여 먹고 났더니
기분이 나아지기에 라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몇 년 전 약국을 할 때는 저녁을 먹고 났어도
10시나 11시 한 밤중에 집에 들어가면 출출해서
라면을 끓여먹고 자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다른 식구들은 다 자고 있어서 부엌에 혼자 들어가 딸그락 거리며
라면을 끓여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 라면 맛은
“평안”이었습니다.
라면에 떡국 떡도 한주먹 넣고 만두도 두어 개 넣어서 한 냄비 그득하게
끓여가지고 거실에 푹 퍼질러 앉아 먹고 나면 종일 환자분들께 시달렸던
것에서 힐링이 되는 느낌이고 이내 졸음이 오고 잠도 잘 자게 됩니다.
물론 자고 나면 몸이 좀 붙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힐링푸드가 있다고 하지만 나에겐 라면이 힐링푸드입니다.

어릴 때 우리 집은 형제도 많고 가난한 목사님 가정이라
먹을 것이 없어서 정부에서 하는 분식장려 운동이 아니더라도
국수나 수제비로 거의 저녁끼니를 이었습니다.
동네마다 국수공장이 있어서 길게 뽑은 국수 가락을
하얀 호청이불을 널듯이 널어놓은 국수집 풍경은 보기 흔했습니다.
어머니가 10원을 주면서 국수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종이에 도르르 말아주는 국수를 들고 오면서 한가락씩 빼 먹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면 한가락 빼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똘똘 만 종이가 느슨해 져서 양 옆으로 국수 빠져 나오려고 해서
그거 밀어 넣다가 보면 부러트리기도 하면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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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는 국수만 푹 삶아서 먹지만 가끔 라면이 한개 들어가는 때도 있는데
그건 특별식에 속하는 음식이었습니다.
라면을 통째로 하나 삶아 먹는 다는 것은 기대도 안하고
긴 국수 가락 속에 유난히 고급스럽고 유혹적인 꼬불꼬불한 라면 가락은
왜 그리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형제들은 라면 가락을 더 달라고 국수그릇을 어머니께 내어 밀곤 했습니다.
저녁마다 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살았던 형제 중 우리오라버니와
내 밑에 여동생은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닌) 어른이 되어서도
국수를 먹기 싫다고 했습니다.
이상하게 난 국수가 싫지도 않고 지금도 일산칼국수나 해물 칼국수 집에
식사하러 가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외롭고 쓸쓸하거나 속상하거나 피곤하면 라면을 먹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라면을 먹으면서
국수 속에서 꼬불거리던 라면가락을 골라 먹던, 어려운 때를 떠 올리는 것도 아니고
라면을 한개 통째로 끓여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을 위로받을 그런 것도 아님에도
라면은 그렇게 나를 위무하고 평안을 줍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놓고 청승스럽게 어찌 먹을까 망설이다 그래도 배가 고픈 듯해서
거실에서 조그만 찻상을 놓고 라면 냄비를 통째로 올려놓고는
알타리 김치를 우적우적 씹고 라면을 건저 먹고 국물을 홀짝거리며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개그 콘서트를 봤습니다.

텅 빈 집에서 독거노인처럼 쓸쓸하다가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라면을 천천히 먹고 났더니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외롭고 쓸쓸한 날 한 번 해 보세요.
나에겐 라면이 힐링푸드가 되는 군요. ^^

순이

6 Comments

  1. 데레사

    2015-02-12 at 05:00

    저는 팔도비빔면을 힐링푸드로 정해 놓았습니다.
    면을 끓일때 냉장고에 굴러 다니는 야채들을 쓸어넣고
    끓여서 찬물에 헹궈내서 소스에 비벼 먹는 맛이 최고거든요.
    몸에 나쁘다고 하지만 그런건 개의하지 않거든요.

    순이님
    가까히 있으면 나랑 라면 한젓가락씩 해도 좋을텐데….   

  2. 바위

    2015-02-12 at 12:09

    ‘라면’이란 제목보고 들어왔습니다.
    저도 라면에 관한 추억이 많거든요.ㅎㅎ

    우선 하나만,
    67년 12월 훈련소 입대했을 때
    취침시간이면 부내무반장(일병)이 꼭 반합에 라면을 끓여 먹었지요.
    그 구수한 라면냄새 맡으며 휴가가면 라면만 먹겠다고 다짐했었지요.
    그 부내무반장이 알고 보니 고교 1년 후배였습니다.

    라면은 가끔 한 잔할 때 안주도 되었지요.ㅎㅎ
    감사합니다.    

  3. 신인철

    2015-02-12 at 17:32

    선생님 글 잘읽었습니다…지금보면 별거아닌것 같지만 선생님 같이 끓이는 만두라면을 궁중라면으로 부른 시대도 있었던것 같습니다.힘든시대 밀가루음식에 대한 향수..국수,자장면….그시대를 지켜오신 어르신 세대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건강하시고…적당한 면식은 나쁘지 않은것 같습니다…   

  4. mutter

    2015-02-13 at 01:55

    순이님 옛날 이야기 해주어서 좀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고생했던,그래도 그리운 그 시절, 생각하면 눈물이 핑도네요.
    혼자라는 외로움.갑자기 텅빈 집. 그래서 밥맛이 없었나봐요.
    저도 혼자있을때는 라면을 가끔 먹어요.

       

  5. 怡到

    2015-02-13 at 03:37

    공감 합니다 딱 하나 다른건 국수를 별미로 먹었다는거지요
    혼자서 먹는것도 오래되면 괜찮아 지더군요 절로,,ㅎ ㅎ
       

  6. 황성옛터

    2015-02-16 at 01:41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공감을 합니다.
    아마도 제목에 라면을 보고 내용으로 들어와 읽은 분들이 꽤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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