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임종을 지키는 일이 생각 만큼 쉽지 않아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면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릴 땐지 20대 젊을 땐지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의 첫 장면에 부딪쳐 충격때문에 소설을 내쳐 읽지 못 한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죽었다.”
“엄마가 죽었다.”
이렇게 번역자 마다 첫 부분의 시작이 다른데 우리의 정서로는
모친 사망이라는 상황을 접했을 때 저렇게 남의 말 하듯

담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이웃집 강아지가 죽은 것보다

담담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외아들이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아마 어제 돌아가셨을 거라고 짐작 하는 아들도 이상하고
양로원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이 찾아와 볼 수있게하지 않고
죽은 다음에 전보를 보내는가 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내가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던 나이엔 우리나라에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없을 때이고
양로원이라고 하면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수용시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후를 부양할 자녀는 꼭 있어야 하고 자녀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
노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제사지낼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했습니다.
양로원시설도 없었지만 노인들끼리 모여 여생을 보내는 일을
아주 운 나쁜 노인이 맞이해야할 슬픈 인생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때에 까뮈의 이방인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외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 전보를 받아들고
엄마가 죽었고 오늘 전보를 받았지만 죽은 것은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이러는 뫼르소의 행태는 전혀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오래전 번역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이렇게 시작을 했지만
요즘엔 "엄마가 죽었다." 이렇게 번역합니다.
뫼르소의 그 후 행태를 보면 전보를 받아들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렇게 말했을 것
같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이 소설의 분위기와 맞는 것 같습니다.

요양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까뮈의 이방인을 떠 올릴 때가 있는데
요양병원에선 임종이라는 아주 미묘하고 슬픈 시간을 맞을 때가 많습니다.
임종을 지켜봐야 하고 그 순간에는 가족이 모두 모이는 우리나라 정서상
아무리 오래 요양병원에 계셨다고 해도 돌아가실 때가 되면

"임종을 꼭 보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는 분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타이밍을 맞추기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실 때 하는 임종호흡이 시작되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이 다 도착했는데 상태의 호전 없이 그대로 호흡이 유지되고 있으면
아마 하루 이틀 더 계실 것 같다…..이러며 식구들이 돌아가게 됩니다.
멀리서 온 자녀들이나 직장 등의 이유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니 집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90세가 넘은 할머니께서
단지 가족들이 지켜볼 수 있는 임종을 위해 우리병원으로 오셨습니다.
할머니께서 함께 사는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시다가 옆으로 쓰러지시기에
급하게 응급실로 모시고 갔지만 뇌출혈이 심해서 뇌압이 오르고
연세가 높아서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 한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계속 계시니까
가족 면회가제한되어 임종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에 우리 병원으로 모셨던 겁니다.
이미 쓰러지는 순간에 의식을 잃어서 말씀을 하신다거나 누굴 알아본다거나 하는
것을 할 수 없으니까 유언을 받을 것도 없고 임종을 지킨다는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에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임종실에
자녀들이 다 모였지만 할머니는 계속 주무시는 듯 고요하게 밤을 새웠습니다.
밤을 임종실에서 보낸 가족들이 아침이 되어 집으로, 회사로 가고,

미혼의 따님 혼자 지키다가 잠시 병원 가까이에 있는 집에 다니러 간 사이에

혼자 계시다가 긴 호흡이 멎었습니다.

단지 자녀들이 임종을 지키려고 면회가 어렵고 보호자에게 폐쇠된 중환자실에서

요양병원 임종실로 옮겨오기까지했지만6일만에 돌아가시면서결과적으로 임종을

자녀들이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부터 임종에 관련된 속설이 많습니다.
혼자 살다가 아무도 없이 혼자 돌아가셔서 방치되기까지 한
고독사도 요즘엔 흔하긴 하지만
가족이 있어도 혼자 돌아가시는 일이 흔합니다.
자다가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고 자녀가 많아도
임종을 지키는 자녀가 있고 못 지키는 자녀가 있습니다.
돌아가시는 분 입장에서나 자녀 입장에서나
"임종 복은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외국에 나가 살아 몇 년씩 못 보던 아들이 출장으로 귀국하여
우연치 않게 자녀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늘 옆에 있던 자녀들이 무슨 일인가 다 나가고 없는 순간에
혼자 세상을 뜨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대부분 부모의 임종을 보기를 원하지만
가끔은 돌아가신 후에 연락을 달라는 분도 있는 것을 보면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처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 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담담히
하게 되는 이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종실에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찬송이 조용하게 들리고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요히 하늘나라로 가는 일이

앞으로는 보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순이

4 Comments

  1. 데레사

    2015-07-19 at 02:52

    순이님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이제는 요양원을 거쳐서 죽음으로 가는것이 보편화되듯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기도 쉽진 않을거에요.

    변해가는 세상, 그냥 아득하고 쓸쓸하고 슬퍼지만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 봅니다.   

  2. 노당큰형부

    2015-07-20 at 12:49

    인간도 동물인듯
    살다가 죽는건가요?

       

  3. 양송이

    2015-07-21 at 09:26

    사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음은 단지 죽음일 뿐 다른 의미가 겹쳐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죽음에 억지로 의미의 덧붙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뮈르소, 까뮈, 아니 실존의 핵심이었지요. 사람이 죽음의 의미 덧붙임으로부터 벗어나야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뮈르소는 장례식날 해변에서 아랍인을 살해하고도 판사 앞에서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태양이 살해했다고 진술합니다. 까까머리 시절 하도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라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요양병원은 쓸쓸한 곳인데…
       

  4. 산토끼

    2015-07-30 at 15:39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ㅇㅇ사망’이라 무덤덤하게 말할 수가 있겠지요.

    지난 주에 제 형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항공표를 찾으니 너무 비싸서
    왕복 2300마일(3600킬로)을 아이들과 교대로 운전하였습니다.

    무던히도 암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슴에도 온 몸에 퍼지게 되었고
    어떤 분의 ‘이제는 가셔도 되겠습니다’ 는 조언을 받아드리고
    다음 날, 편히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형제들과 많은 조카들이 먼 곳에서 모여와서 3일장을 잘 마쳤으며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새삼 느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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