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마치고
1200번 버스를 타러 동화면세점 앞에 갔는데 늦은 시간까지 소란스러웠습니다.
낮부터 계속한 무슨 문화제 끝인 듯(요즘엔 데모가 아니고 문화제라는 군요)여러 사람이 모여
마이크로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방송을 하면서 "박근혜 퇴진" 피켓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여러 가지 상념이 많았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올해가 회갑이고 내년부터는 연금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1955년에 태어나서 만 60년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가난할 때 이야기지만 그중에도 더 가난하던 강원도태생입니다.
국가가 가난하던 625전쟁 후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형제간에 서열이 장녀입니다.
하기 좋은 말로 첫 딸은 집안에 살림 밑천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으로 귀하게 대접받기 보다는 경제적인 효용가치로서의 딸입니다.
부모를 도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고 한사람의 몫을 하며 자랐습니다.
국가 의무교육에 힘입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등록금을 제때 못 내어 선생님께
맞기도 하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중2때 등록금 안낸다고 (못 내는 건데) 때리던 여선생님은 야속합니다.
베니아 판으로 된 넓적한 출석부로 등짝을 친구들 앞에서 맞는데 참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부모님이 속상할 까봐 맞았다 소리 한마디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여아들은 상급학교 진학을 많이 못할 때라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갈 때 내 친구는 동생을 업고 문밖에 나와
아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등록금을 못 내어 매를 맞아도 학교는 열심히 다녔습니다.
친구들 대부분이 1980년도 전후에 결혼해서 서울에 와서 아이를 낳고 살면서
집에 시동생이나 시누이를 대려다 공부 가르쳐 시집장가를 보냈습니다.
연탄불에 냄비밥을 해서 먹으면서도 저축하고 시댁의 생활비를 보태고
짬짬이 어른들의 농사일을 도왔던 우리 강원도 태생의 여인들입니다.
친구 한명이 내년부터 손녀를 보기로 했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끝내고 복직을 하면 손녀를 봐야 한다고 걱정하자
(허리가 아프고 관절이 좋지 않은 친구라)
손자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이 조언을 합니다.
"걱정 하지 마, 어린 아기랑 놀면 너도 더 젊어지고 생기를 얻을 수 있어"
이러며 주의를 당부하는데 손자를 돌 볼 때는 전심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손자니까, 제 엄마가 있으니까, 하면서 대강 곁다리로 설렁설렁
쉽게 애를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불안하지 않게 전적으로 신뢰형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외국에서는 남의 나라 장애아까지 입양해 키우는데
내 손자 손녀를 돌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합니다.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데 남도 아니고 내 손자 손녀 키우면서
힘들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친구를 나는 새삼 감동을 하면서 바라봤습니다.
본인도 전문직이라 하시라도 일할 수 있는데 큰 손자 한명을 키웠고
지금도 이웃에 두고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키면서 작은 딸의 손자를
집에서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모임은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평생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을 대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였고
학교에 갈 때는 자녀가 등교를 하고난 낮 시간에 모였고
지금은 자녀들이 직장을 쉬는 주말에 모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항상 나의 스케줄을 만들지 않고 모든 것을 자녀위주로 생활했습니다.
보통은 "내가 평생 너희들을 위해 노력했으면 이젠 나도 내 맘대로 하겠다."
이럴 거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녀에게 도움이 될까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통령은 박정희대통령밖에 모르던 시절에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일행이 지나가는 도로변에서 태극기를 들고 몇 시간씩 대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게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히 대통령을 이름을 불러 가며 아웃이라고 하는 불경스러운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리 대통령 이러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뤄놓은 우리나라 입니다.
지금도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을 걱정합니다.
혼란이 없어야 하는데…….
환경이 더 이상 파괴되면 안 되는데……..
경제가 어려우면 우리 자녀들이 살 기 어렵지 않을까 등등
우리 친구들은 나를 생각하기 이전에 나를 희생해서 내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는 정말 착한 시민입니다.
(마침 모임 날이 생일이라 아이스크림 케잌을 사다 놓고 친구의 생일 파티를 했습니다.)
회갑을 맞은 친구 표정을 보세요.
저렇게 천진난만하고 착하게 사는 내 친구들이 걱정하는 국가의 안위를
어떡해야 지킬 수 있을지
왜 국가를 위협하는 데모를 계속하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친구들과 송년모임을 했습니다.
서촌에 대해서는 참나무님의 포스팅을 참조하여
통인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박노수미술관을 지나 겸재 정선의 그림이 있는 인왕 계곡까지 걸어올라가
종점에서 차 한잔 마시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섹스피어의 탬페스트 연극을 보고
저녁식사까지 긴~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희생과 봉사를당연히 여기는 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데모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같은 광화문에서 누구는 데모를, 누구는 파티를 하는 군요.
순이
벤자민
2015-12-20 at 01:20
와우~~~
아니 누가 저 분을 회갑이라고..
한 40대 중반 정도도 안되보이시는데
혹시 남자 친구 필요 없냐고 여쭈봐 주세요 ㅋㅋ
이번에 고생하시고 덩달아 속도 많이 상하셧겠지만
잘 참으시고 자제 하신 것 참 잘하셨습니다
즐거운 년말이 되세요
참나무.
2015-12-20 at 01:47
아고 반가워라…
포토존에서 인증샷 올리는 센스…멋져요~~
수성계곡 9번 마을버스 종점 근처에 있던
‘굿띵 커피’ 없어지지않았다면 더 좋았을텐데…
송년을 멋지게 보내고 계시네요…
( 벤자민 님 최근 모 홈의 답글…멋진 마인드라고 제가 칭찬 마이했고요
답글은 잘 안다는 거 아시지요…^^
건데–>’근데’로 고치면 금상첨화- 뭐 것도 개성이긴하지만서도…ㅎㅎ)
데레사
2015-12-20 at 01:47
저는 순이님 보다 나이가 한참 더 많이 정말 더 어렵게 살았지요.
점심을 먹어 본 기억이 없거든요,.
그러다가 박대통령의 새마을 운동 이후 부터 조금씩 사는게 나아진것을
우리 세대는 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직업상 내 나라를 지키느라 일도 많이 했지요.
그걸 여기다 다 늘어 놓을수는 없지만 내나라를 향해 후진국이니
헬조선이니 할 때 마다 속이 상합니다. 물론 청년실업이 걱정
안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부를 믿고 우리 함께 노력해야
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처럼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뭘 해주기를 바라기전에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하라는 이런 취지였지요.
새삼 그 말뜻이 그리워집니다.
정민 맘.
2015-12-20 at 02:04
순이님.
등록금 예기만 나오면 왜??
가슴이 쓰리고 억울하고 아프고
눈물까지~~~
7남매씩이나 …
아직도 많이 아프네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았나 봅니다..
지금은, 모든것이 감사하지요..
순이님, 잔잔한 글~~잘읽고 있어요..
고마워요.
睿元예원
2015-12-20 at 02:25
등을 때린 선생님은
지금 후회를 하고 계실것 같습니다.
그 착했던 세월중에도
때리는 교사가 있었으니요.
친구분의 환한 웃음이 티없습니다.
Lisa♡
2015-12-20 at 10:10
건데~~…ㅋㅋㅋ
참나무님도 참….벤님 갱상도라니까드루.
그나저나 템페스트 어땠어요?
벤자민
2015-12-20 at 12:28
순이님
건데 요즘 제 칭찬해 주신분 들이 많아 몸 둘바 를 모르겠어요
가셨다 오셧어 그런 모양 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