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요즘 우리 병원엔 봄이라는 한 학생의 이야기가 큰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전 직원이 80명쯤 되는 작은 규모의 요양병원이라 모든 직원들이 가족 같이 지내는데
간호사 한분의 따님이 서울에 있는 의대에 합격해서 모두들 자기 일처럼 기뻐합니다.
병원장님이 기독교인이고 병원 신우회가 있어서
올해 초부터 수능을 보는 직원의 자녀 이름을 칠판에 적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봄이가 의대에 합격했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엄마와 학생의
남다른 노력을 알기 때문에 내일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즐겨 하는 말 중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라는
말이 있는데 이 학생이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독서실도 안가고 인터넷 강의를 중심으로 집에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친구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리더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과외는 중학교 때 친구 엄마의 배려로 수학 과외를 잠시 한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나는 그 학생이 쓴 자기 소개서를 읽고 눈물이 났습니다.
요즘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노력하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병원 식구들은 봄이가 최선을 다한 것을 알기에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길 바랐습니다.
이번 대학 입학을 위해 대학에 재출할 “자기소개서”를 쓸 때
우리 병원장님께서도 본인의 자녀나 되는 듯 적극 검토해 주셨고
나도 자소서 쓰는 일에 조금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요즘 그 분의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자녀가 7명이나 되었으니 우리 아버지의 삶은 신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버지는 외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심약하고 착하기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공부에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요즘으로 하면 선행학습입니다.
저녁밥상으로 펴 놓고 밥을 먹었던 두레반에 오빠와 나를 앉혀놓고 가가거겨고교구규를
달력뒷장에 써서 붙이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익히게 했고 구구단을 외우게 했습니다.
음표와 사과를 그려서 온음표는 사과 한 개 2분 음표는 사과 반 개 4분 음표는 …
이런 식으로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침을 해결하고 나면 저녁 땟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극한의 가난 가운데도
자녀들의 공부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그 시대에는 앞서가는 이상주의자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열심히 가르치신 덕분에 오라버님은
열심히 공부해서 시골에서는 가기 어려운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오라버니가 서울대에 합격하자 동내 사람들이 아버지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이웃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존경하더군요.
하물며 동내 파출소 순경도 인사를 하러 왔었어요.
우리아버지는 그때 아들을 키운 기쁨을 맛보셨고 효도를 다 받으신 것 같습니다.

요즘 딱 봄이 엄마의 모습에서 오래전 우리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이 봄꽃처럼 활짝 펴졌습니다.

아래는 제가 도와준 자소서의 일부분 입니다.
이대로 제출하지는 않았고 본인이 수정을 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인문학서적을 쌓아놓고 읽으시는 철학적인 분이시고 어머니는 요양병원간호사이십니다. 두 분 다 부지런 하시고 열심히 생활하시지만 생활은 늘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따뜻하고 사려 깊은 부모님 덕택에 고1 방학 중에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이 공부를 보충해야 하는 방학 중에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가는 일을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몸은 지쳐갔지만 정신은 명료해졌습니다. 같이 걷던 사람들 중에 제가 가장 어렸습니다. 제가 허약한 어머니를 부축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여행하는 분들이 저를 칭찬을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할 때에 나는 오직 인터넷 강의만 들었습니다. 어머니 동료분이 자신의 아들이 공부한다고 사놓고 풀지 않은 문제집을 아깝다며 나에게 준 책을 풀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께는 학교 수업 외에 과외비용 부담을 드리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내신 등급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교과서나 인터넷 강의를 통해 개념을 정리하고 많은 문제를 여러 번 풀어보는 동안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공부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만약 노래하는 것이나 춤추는 것이 공부보다 더 즐거웠으면 아마 그 길을 택할 것 같습니다. 화학의 산-염기 중화반응은 공부할 때 너무 힘들어서 이 부분을 포기할까 한 순간도 있었는데 지레 겁을 먹고 있지는 않은가 해서 다시 차근차근 하다 보니 해결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의 한켠에서 ‘이 부분이 그렇게 시험에 많이 나오지 않을 테고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할 테니까 대충하고 넘어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얕게 공부하는 게 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고 분명히 후회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노력하면 안 될 건 없다’, ‘내가 오늘 안에 이 부분은 꼭 해 내겠다.’ 라고 다시 도전을 하면서 어려운 그래프나 표는 노트에 그려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자료를 해석했습니다. 숫자를 내 마음대로 바꾸거나 그래프를 변형시켜서 다시 해석해보고 그렇게 하니 점점 자료 해석에 자신감이 생겼고 결국 시험장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학기 말에 성적표를 받았을 때는 제 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 경험은 후에 다른 과목의 학습에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사실 학업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다른 외적 요인보다는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1등을 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이 행복했지만 차츰 부담이 되고 1등을 못 할까봐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생각한 것은 인생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난관을 극복하는 것은 내 자신이지 누가 대신해 주지도 못할 일에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순례의 길을 걷다가 너무 힘들고 다리가 아프고 발이 아파서 주저앉고 싶을 때 어머니도 내 대신 걸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고 결국은 내 자신이 극복해야 할 삶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 자신이었고 나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남’이 아닌 ‘나’를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꿈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고 그것을 위한 공부를 하다 보니 정작 남의 얘기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방향이 잡히니까 그동안 하던 공부가 가치 있게 느껴졌고 배움 자체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하 생략)

요즘엔 대학 입학에 자기 소개서는 아주 중요한 점수가 된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본인이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 활동을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써 보라는 것도 있고 (서울대)
고등학교 재학 기간에 읽었던 책 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3권 이내로 선정하고

그 이유를 기술하라는 문항도 있습니다.
학교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하라는 등

자소서는 A4용지를 가득 10정도 써야하는데 한 사람의 인생이 보입니다.

봄이 엄마는 제가특별히 예뻐하는 분이고 정이 갑니다.
우리 봄이와 봄이 엄마 정말 수고가 많았는데
요즘 환하고 기쁜 얼굴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봄이가 앞으로도공부해야하고 수련해야 하는 긴시간이 남아 있지만

공부가 가장 쉬운 사람이라 잘 해 나갈 것 같고

좋은 인성으로 좋은 의사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순이

5 Comments

  1. 데레사

    2015-12-23 at 00:57

    나도 축하해 주고 싶어요.
    좋은 의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푸나무

    2015-12-23 at 01:15

    아 봄이….기쁘고 즐거운 이야기네요.
    오빠 효도 그 때 정말 다 하셧네요.    

  3. cecilia

    2015-12-23 at 05:54

    순이님, 죄송합니다만 개천이 아니네요.

    굳이 기준을 따지자면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신 부모님들 밑에서 자랐으니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대목에서 저는 한국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모순된 사고방식을 봅니다. 모두들 돈이 최고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고방식을요.   

  4. 고운 바다

    2015-12-23 at 13:09

    훌륭한 오빠분이 계시군요. 든든하시겠습니다.
    가난이 스승이다. 이런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막상 가난 속에 있을 때는 쓰라린 것이지요.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군요 .

    즐거운 성탄절 맞이 하시길 ……HAPPY NEW YEAR !
       

  5. 노당큰형부

    2015-12-23 at 21:38

    훌륭한 자기소개서 입니다.
    즐거운 성탄휴일 보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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