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잠시 무료급식 봉사활동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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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 후에 태어나 혹독한 가난을 경험한 세대로서 캄보디아를 보게 되니 그 실상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강원도에 살던 어린 시절 전쟁 중에 다친 군인들이 의족도 아닌 임시로 사용하는 갈고리 같은 손을 옷소매 사이로 내놓고 뭐라도 달라고 하면 그게 그렇게 무서웠습니다. 마루에서 식구들이 밥을 먹으면 대문간에 밥을 얻으러 오는 분이 많았는데 할머니나 어머니는 뭐라도 덜어다 드렸습니다. 지금 할머니가 되어 캄보디아의 많은 장애인들을 무섭지는 않았지만 이 나라가 언제 이 고통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폴 포트는 악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폴 포트는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과거 조상의 화려한 영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폴 포트 본인과 자신을 지켜줄 군인 그리고 농민만 있으면 된다고 프놈펜 등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어느 날 갑자기 모두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라고 했답니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다가 국가 시책에 반대하는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시골로 이주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자기 이론을 가지고 있는 의사나 교사 등을 사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 안경을 쓰고 있거나 손이 곱다는 이유 같은 것으로 자국민을 살해했습니다. 기존의 경제 정치 그리고 사회적인 틀을 개조하고자 하여 국민의 1/3을 죽였다니( 무려 200만에서 250만 명이라고 합니다.) 폴 포트는 정신 나간 사람이 분명합니다.

내전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땅을 파다 보면 무더기로 유골이 나오는 통에 땅파기도 무섭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해된 유골들을 모아 탑으로 만든 곳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그걸 보는 관광객도 안내하는 가이드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히틀러가 그렇게 잔인했다고 해도 동족은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종족을 지켰는데 어떻게 자기 종족을 그렇게, 그런 이유로 살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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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려운 곳에서 우리나라 다일공동체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투어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인데 100불이면 300명가량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 팀에서도 즉석에서 여러분이 100불씩 후원을 했습니다. 밥을 배식하거나 설거지 등도 도왔습니다 . 하나투어에서는 일 년에 이천만원을 지원하고 우리가 지불한 여행비에서도 얼마간이 후원비로 쓰인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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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의 질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밥과 생선국 그리고 계란말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계란말이는 계란 한 개도 안 되는 손가락 두 개정도 되는 조그마한 조각입니다. 정오가 되자 식사를 하러 많은 어린이가 몰려왔습니다. 어린이는 대부분 맨발입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아이들은 재미있게 뛰어놀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뛰어노는 어린이가 어찌나 짠하고도 예쁜지 모릅니다. 밥을 기다리면서 가위바위보 놀이도 하고 공깃돌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우리가 어릴 때 놀던 그 아이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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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서 식판 하나씩을 배식 받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5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비닐봉지에 그 밥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먹지 못하고 그걸 싸가지고 집에 가서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제각각 봉지에 싸가지고 가지 그걸 혼자서 먹는 아이가 드물었습니다. 밥과 국과 계란말이가 비닐봉지 안에서 섞여도 그걸로 끼니를 이으려고 어른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일 공동체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먹이려고 하다 보니 어른들은 못 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이 혼자 먹어도 그다지 흡족할 것 같지 않을 밥이지만 그걸 싸가지고 가서 어른들을 봉양(?)해야 하나 봅니다.

캄보디아의 날씨는 덥고, 어른들이 일해서 돈 벌 곳도 없고 자녀는 자꾸 태어나고 먹을 것은 없다보니 무료급식소는 만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수난을 받은 역사가 있다 보니 부모들이 자녀를 공부시키려는 의지가 없어서 학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급식이 필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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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캄보디아 사람들은 체격이 자그마하고 온순하고 눈이 예뻤습니다.

 

순이

4 Comments

  1. 데레사

    2016-02-09 at 17:59

    제가 캄보디아에 갔을때도 보니 어린아이들이 물건을 팔러
    다니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말도 제법 잘해서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으니까 선교사들이 가르쳐 줬다고 답하더군요.

    가이드가 그냥 돈을 줄 수 없으니 노래라고 시키고 돈 주자고
    해서 그렇게 해서 몇 아이에게 돈을 조금 모아 준적이 있어요.
    우린 모두투어로 갔었어요.

    그런곳에 가서 보면 헬조선이니 흙수저 하는 항간의 신조어들이
    우습지요.

    참 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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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tyang

    2016-02-11 at 23:12

    예전에 다일병원을 준공식에 간것이 인연이되어 다일공동체에서 병원자원봉사 1기생으로 교육을 받으며 미국병원자원봉사는 어떤가하고 최일도목사님과 가서 불우한 현지인들에게 무료급식봉사를 잠시나마 한추억이 떠오름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합니다. 세상은 좋은 사람들이 아주많은것을 체험했습니다.
    몇년전에 교인들과 캄보디아 식수지원봉사에도 갔었는데 그들을 보니 우리가 너무도잘살고 있다는것을 느끼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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