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 유적지를 걸을 때 등등 어머니 손을 잡거나 부축해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손에 조그만 손가방을 쥐고 계셔서 어머니 손이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엄마 가방을 차에 두고 내리세요.”라고 했더니
“아니다. 내가 들고 다니면 된다.” 라시며 가방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가방에 뭐가 들었어요?” 라고 여쭈었더니
“내 주민등록증이 여기 있다.”이러시며 손에 들었던 가방을 가슴께로 안으십니다.
“주민등록증은 왜요?” 라고 다시 여쭈니
“누가 보자고 하면 보여줘야지.” 이러십니다.
아하! 그래서 가방을 꼭 손에 들고 다니셨구나 생각이 들어 우리 세자매가 동시에 웃었습니다.
“엄마 이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보자고 할 사람이 없어요.” 라고 설명을 드렸으나
어머니는 손가방을 배낭에 넣어서 메시거나 손에 들거나 하시며 몸에서 떼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방속이 궁금해서 저녁에 호텔에 돌아와 어머니 손가방 속을 구경 좀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남의 가방은 왜 보자고 하느냐” 하시면서도 열어 보여 주셨는데, 손가방 속에는 오라버니께서 여행 중에 쓰시라고 준비해 주신 용돈과 달러가 있었고 올케언니가 챙겨준 선크림, 손수건, 휴지, 사탕, 안경집 지갑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다른 것의 용도는 다 알 것 같은데 정작 어머니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주민등록증은 보이지 않기에
“엄마 주민등록증은 없네요? 안 가지고 오셨어요?” 라고 하니
가방 안쪽에 달린 지퍼를 열어서 비닐뭉치를 꺼냈습니다.
“그게 주민등록증이에요?” 우리 자매는 깜짝 놀랐습니다.
비닐 봉투를 열고 다시 비닐로 싼 두툼한 것을 풀자 사각으로 된 식탁용 냅킨에 소중하게 싸여 있는 코팅에 상처하나 없는 주민등록증이 나왔습니다. 주민등록이 발급된 당시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싸 두시고도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어 보였습니다. 사실 구십을 바라보는 안노인의 주민등록증이 필요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공항에서 수속을 할 때나 출입국 통과 시에 “주민등록증을 꺼낼까?” 그러실 때 마다 “엄마 여권 제가 가지고 있어요. 제가 알아서 수속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 어머니는 외국에서도 당신의 신분을 증명할 것은 주민등록증이라는 생각을 하셨던 겁니다. 주민등록증을 신주단지 모시듯 그렇게 소중하게 싸서 손가방 속에 넣어 들고 다니셨는데 어머니는 누가 신분증 보자는 사람이 없어서 혹시 서운하셨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있다 보니 인지저하가 있어서 전에처럼 총명하시진 않지만 지금도 우리 자녀들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지혜로우신데 주민등록증에 대해서는 어떤 포비아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6.25 전쟁 직후에 국내질서가 혼란하고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과 한데 섞여서 주민들의 신원파악이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 ” 어쩌고 하는 516 혁명 공약을 어린이들 까지도 외우고 다닐 때라 이적 행위자를 색출하고 도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하여 발급되었다는 도민증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는 평창에서 강릉을 가는 시외버스도 몇 번씩 검문검색을 했습니다. 검문소라는 곳이 곳곳에 있었고 특이사항이 발발한 때는 아무 곳에서나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놓고 군인이나 경찰관이 버스에 올라서 신분증 검사를 했습니다. 그럴 때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버스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여인들이나 어린이는 괜찮았지만 남자들은 특히 자신을 증명해야할 신분증을 꼭 소지해야 하던 시대를 사셨던 겁니다. 그즈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어디를 가시다가 검문에 걸렸는데 아버지께서 신분증이 없어서 경찰서로 압송(?) 되는 곤욕을 당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손가방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며칠 전 대구 수목원에서 산책중이신 어머니)
어머니의 손가방 속에 꽁꽁 쌓여있는 주민등록증을 공항출입국 통과할 때 마다 꺼내게 해 드릴 걸 그랬나하는 아쉬움이 이글을 쓰면서 드는 군요. 어머니 여권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여권의 존재도 모릅니다. 오직 주민등록증만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정작 주민등록증을 사용할일이 요즘들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순이
데레사
2016-02-18 at 11:19
나도 그러고 있어요.
해외를 적게 나간것도 아니고 나갈때 마다 필요없다는걸 알면서도
주민등록증을 비닐에 싸지는 않지만 핸드백 안 호주머니속에 꼭
넣어 가지고 갑니다.
혹 여권 분실시 재발급 받을려면 현지에서 주민등록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어머님, 그 정도의 기억력과 애착심을 갖고 계시는것 나쁘지는
않아 보여요.
늘 이대로만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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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조
2016-02-20 at 03:18
저도 미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다녀요.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그러는데
나이가 들어 불안해져서 그러는지 아니면 조심성이 많아져서 그런건지?
순이님 어머님, 참 정정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