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순원선생님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우편물이 한꺼번에 많이 몰려오는 날엔 하루에도 일고여덟 통의 우편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직업이 글을 쓰는 일이라 그런지, 선후배 작가들의 새 창작집과 이런 저런 잡지들, 또 이런 저런 간행물들, 거기에 우편함에 꽂혀 있는 이런 저런 청구서들까지 포함한다면 한 아름의 우편물을 들고 현관에 들어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우편물 가운데, 정말 편지다운 편지는 거의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우편물은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 홍수 속에 손으로 써 안부를 묻는 편지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 대관령 아래 시골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점심때쯤이면 면소의 우체국에서 집배원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와 편지를 나눠줍니다. 대부분 서울로 돈을 벌러 간 누나들과 군에 가 있는 형들이 있는 집 아이들이 편지를 받습니다. 쓰는 것도 부럽고 받는 것도 부러웠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편지를 쓸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서울에 공부를 하러 가 있는 형들께 부모님 대신 쓰는 편지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제가 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싫으나 좋으나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그냥 안부 편지가 아니라 이런 저런 안부 끝에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다음 달 하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십사 하는 송금 요청 편지였습니다.
요즘이야 온라인으로 돈을 보내고 카드로 그것을 찾지만, 전화도 귀하던 그때는 등기 우편으로 보내는 ‘우체국 전신환’으로 송금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달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던지요. 어떤 때는 편지를 쓸 때마다 매번 ‘다름이 아니오라’ 돈 말씀을 드리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 송금 얘기를 하지 못하고 그냥 안부 편지만을 보낸 다음 다시 일주일 후 ‘다름이 아니오라’ 송금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군에 있을 때에도 틈틈이 편지를 썼지요. 그 중엔 가끔 ‘다름이 아니오라’ 면회를 한 번 오시라든가 필요한 데가 있으니 부대 바깥 어디로 몰래 돈을 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또 그 편지에 얼마나 가슴 조이며 놀라셨겠는지요. 그렇게 우리 5남매는 형제의 대를 물리듯 부모님께 ‘다름이 아니오라’의 편지를 쓰며 소년 소녀에서 청년이 되고, 또 어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대를 물려가며 ‘다름이 아니오라’의 편지를 쓰며 성장했다면,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이 보내는 편지 속의 갖가지 ‘다름이 아니오라’를 해결해주며 우리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키워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저희들의 ‘다름이 아니오라’를 들어주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는지요.
그러다 더 이상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한 다음부터는 마치 저 혼자 잘나서 큰 듯 이 봄철 안녕하시냐는 편지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따금 전화만 드립니다. 저에게는 아직 고향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제는 어머니 인생의 모든 ‘다름이 아니오라’의 의무를 끝내고 많이 늙으신 몸으로 가끔씩 자식들과 손주들의 안부 전화를 받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내용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이 글이 나가는 날이 제 어머니의 미수 생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우리 자식들을 키워주신 세상의 모든 어머니께 큰 절을 올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어머니들뿐 아니라 함께 고생하신 우리 아버님들까지 우리 부모님들 모두 이 좋은 세상에 오래, 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소설가 이순원
벤조
2016-04-21 at 13:23
감동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름이 아니오라’ 저도 많이 쓴것 같아요.
제 어머니에게도 편지 드립니다. ‘이하동문’
데레사
2016-04-21 at 20:13
맞아요. 그 시절은 그랬지요.
다름이 아니오라를 꼭 편지 앞에다 썼지요. ㅎ
오석환
2016-04-22 at 00:08
기체 후 일양 만강 하옵시며…
불초 소자는 ….
가내 두루 평안하심을 ….
김 수남
2016-04-22 at 00:44
네,맞아요,저도 참 공감이 됩니다.그러고 보니 지금도 종종 저는 사용하고 있네요.
“다름이 아니오라~~”
참 정감있는 우리 말입니다.
늘 건강하시며 행복한 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