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한 장밖에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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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전을 친구들이랑 단체로 관람 했습니다.

제1관에 들어가 그림을 몇 개를 보고 났을 때  20대 커플이 내 옆에 서서 관람을 하다가 그들이 큰소리로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그리라고 해도 저 정도는 그리지 않을까?”
“요즘 그림이라면 저런 그림을 가치 있다고 할까?”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뭐 볼만한 것도 없네.”
데이트를 하다가 갈 곳이 없어서 들어 온 커플인 듯 그림에는 관심이 없고 둘이 붙어 서서 진한 스킨십을 하면서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니까, 괜히 이중섭 그림뿐 아니라 우리세대 전체가 모욕당하는 듯,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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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라 관람객이 많이 붐비는 가운데 연세가 드신 분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할아버지 친구들끼리 온 분도 있고 두 명 세 명씩 짝을 지어 그림을 보는 할머니들도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물고기 그림이나 황소그림, 가족들이 소달구지에다 짐을 싣고 이사 가는 그림에도 오래 서서보고 계셨습니다. “길 떠나는 가족”은 아내와 아들 둘이 탄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화가 자신의 모습인데, 생이별한 가족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 마음이 애잔했습니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이 아버지와 오빠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리어카에다 짐을 싣고 이사를 해 본 경험도 오버랩 되더군요. 화가의 염원이 아니라 실제로 가족을 싣고 이사 가는 모습이었으면, 화가가 그 정도만의 행복을 누렸어도 얼마나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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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는 느낌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 그림의 세계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젊은이들이야 종이가 귀한 것이 무슨 소린가 할 겁니다. 종이 아껴 쓰라는 소리도 별로 못 들어보고 큰 사람들이라 집안에 종이가 한 장밖에 없어서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딱 한 장 있는 종이에 편지를 쓰는 가장의 그 애절한 마음을 알 리가 없을 겁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더군요.

아빠가 사온 종이가 다 떨어져 한 장만 그려서 보내요.
“아빠가 너무 좋아”라고 엄마한테 말했다면서요?
아빠는 그 말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뽀뽀뽀뽀뽀뽀뽀뽀뽀………….

일제강점기를 지나 육이오전쟁과 전쟁직후의 그 어려운 시대를 산 이중섭화가는 가난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림은 잘 모르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중섭화가가 가족들에게 써 보낸 편지들이 더 마음에 닺더군요. 떨어져 사는 아내와 자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써내려간 편지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뽀뽀뽀라는 글자를 편지지에 테두리로 그림처럼 그려 넣은 것도 있고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라고 편지 서두에 쓰고 이어간 글들이 젊은 나이에 아내와 떨어져, 그것도 가난 때문에 멀리 두고 살아가는 남편의 애달픔이 잔뜩 묻어있었습니다.

나도 지금은  집에 프린터까지 두고 A4 용지를 겁도 없이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지만 가난을 경험한 세대라 화가의 집안에 종이가 한 장 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히고 절망적인 일인지 상상이 갑니다.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린 그림들이 지금은 거액으로 거래 되지만  가난한 예술혼의 상징 같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작품 호당 평균가격이 두 번째로 높은 화가이지만 그분은 적십자 병원에서 무연고 행려병자로 돌아가셔서 친구들이 장례를 치러드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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