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 뒤에 사인회 꼭 해야 하나?

김선욱 연주를 가까이에 앉아서 들으면서 재능 있는 연주자는 정말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악영재로 우리에게 다가온 김선욱은 연습벌레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타고난 영재가 노력을 겸하기 때문에 지금의 성공이 있는 것을 봅니다. 재능이 부족한데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은 분명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람누리에서 연주한 “디아 벨리 변주곡”은 베토벤이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 뒤 말년에 쓴 작품으로 그의 피아노 음악의 정수이자 역작으로 꼽힙니다. 20대 중반에 베토벤 소나타와 협주곡 전곡을 완주한 바 있는 김선욱은 “ 디아 벨리 변주곡은 마지막에 가선 말 그대로 천국을 걷는 느낌이 드는 곡”이라며 이번 작품에 애정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연주시간이 한 시간이나 되는 대곡을 악보 없이 순전히 암보하여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영재로 태어나고 자란 연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입니다. 타고난 특별한 재능이 없이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일 겁니다. 활자로 된 책을 보고 읽어도 한 시간을 계속해서 읽으면 발음이 꼬이기도 하고 틀리게 읽히는데 그걸 완전히 외워서 대중들에게 말로 전달하기도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1시간 넘는 악보를 순전히 외워서 연주하는 것은 뛰어난 천재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김선욱 (1)

29세 김선욱은 지금이 스스로 애매한 시기라고 말한답니다. 어릴 때는 영재로 불리었지만 아직 서른 전인 나이라 연륜 있는 거장이 된 것도 아니고 영재도 아닌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반 위의 젊은 거장 김선욱의 장기이자 그의 연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온 작곡가 베토벤에 다시 한 번 집중하여 들려준 디아 벨리 변주곡은 감동이었습니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는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강렬한 성취감을 느껴요. 제 능력의 최대치를 모조리 쏟아부어야 만이 달성할 수 있는 존재랄까…. 그 성취감은 마치 마약 같아서 늘 도전하게 됩니다.” 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더군요.
서정적인 슈베르트 소나타 18번 G장조와 모차르트 환상곡 D단조는 1부에서 들었습니다.

연주자가 음악에 흠뻑 젖어들어 연주를 스스로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좋더군요. 연주는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는 연주자의 표정을 보는 것이 음악회를 가는 기쁨인 것 같습니다.  비주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대부분 연주자들은 긴장 속에서 딱딱한 자세로 연주를 하는데  김선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랑랑만큼은 제스처가 크지 않았지만 얼굴 표정에 모든 음색을 나타냈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답고 고요한 표정을 하다가 과격하고 격렬한 부분에선 인상이 험해 지기도 하고 뻐기는 듯도 하고 건방진 표정도 지었다가 다시 온화해지기도 하고 개구쟁이 모습도 보이고 건반을 가지고 유희를 즐기는 듯했습니다. 피아니스트와 피아노가 합체를 이루는 것 같았고 모노드라마를 하는 듯 표정이 풍부했습니다. 연주자의 발치쯤에서 음악을 듣다 보니 유난히 까만 구두에서 반사된 빛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김선욱은 단정하고 성실한 연주자였습니다.

김선욱2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몸으로 연주를 마치고 앙코르 곡을 두 곡이나 더 연주를 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그 감동을 안고 로비로 나오자 사인을 받으려고 길게 늘어선 관객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악회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연주자에게 사인을 받는 일은 관객에겐 기념될 만한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피아니스트에게 너무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컴퓨터 자판도 두어 시간 사용하고 나면 손목이 아픈데, 순전히 손목과 손가락 힘에 의해 소리를 내는 피아니스트는 손목의 힘이 강화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까요? 연주 자체만으로도 손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중노동인데 다시 사인회를 한 시간 가량 하는 것은 아껴야 할 연주자를 너무 혹사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에너지를 쏟아내며 땀을 흘린 연주자는 다음 연주를 위해서 쉬기도 해야 하고 손을 좀 아껴야 하지 않겠어요? 손목에 피로를 가중시키는 사인회 대신에 연주자를 만난 기념을 위해서라며 휴대폰으로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 더 시대에 맞을 듯합니다. 휴대폰 사진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주인공이 직접 손으로 써 준 필적이 기념이 될 수 있었지만 요즘엔 인증 사진이 더 직접적이고 유효할 것 같습니다. 포토 존을 만들어 연주자는 앉아 있고 관객들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대신하면 훨씬 기념이 될 듯합니다.

사인을 받으려는 긴 줄을 보면서 워낙 대중의 사랑받는 연주자이긴 하지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연주자를 너무 가까이에서 본 탓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재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손목도 좀 아껴야 하고요. 목소리를 사용하는 성악가는 사인회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만 앞으로 사인회대신 인증샷이벤트를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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