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소설 사임당 작가의 말 (펌)

정사를 바탕으로 이야기할수록 점점 더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가는 사임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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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성 가운데 신사임당처럼 태어나고 죽은 날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인물도 드물다. 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고 1551년 5월 17일 47세의 일기로 서울 삼청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는 48세다.

사임당뿐 아니라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도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중간 중간 행적이 외손자인 율곡이 쓴 글 말고도 『조선왕조실록』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여자의 삶에 모녀가 함께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 모녀가 함께 학문을 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집안이 전통적으로 딸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사임당의 삶이 다른 여성들의 삶과 다른 점인지 모른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 임금조차 여자는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다행인 것으로 여기던 시대에 사임당은 과거시험을 보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경전과 문학서와 역사서를 두루 공부하고 따로 서화의 세계를 익혔다.

오죽헌을 처음 지은 사임당의 외고조부 최치운에서부터 그의 아들 최응현과 그의 사위 이사온과 또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아버지)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오죽헌의 주인들 모두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딸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이렇게 생몰년월일과 행적이 뚜렷하게 전해오는 인물인데도 어떤 문헌에도 사임당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시대 여성 인물 가운데 본명이 뚜렷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은 후대까지 통틀어도 허초희(난설헌) 민자영(명성황후) 등 몇 명되지 않는다. 정난정과 장옥정은 중간에 붙여진 이름이지 그것이 본명이라 확신할 수 없다.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다음 아들 율곡이 쓴 어머니의 행장에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적는 것을 피하여(기휘라고 하여 임금과 부모와 조상의 이름을 문자로 쓰거나 입으로 부르는 것을 불경하게 여겨) ‘자당의 휘는 모(某)로 신공의 둘째 딸’이라고만 적었다. 만약 어머니의 이름을 행장에 그대로 쓴다면 그것은 율곡이 유학자로서 오히려 어머니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 되어 사임당에 대한 여러 기록 속에 정작 사임당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자료에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나와 있는 것이야말로 한 편의 역사 코미디와 같은 일이다. 1990년대에 출간된 어떤 동화에 사임당의 어린 시절 이름을 ‘인선’이라고 쓴 다음부터 연이어 나온 문학작품 속에 작가들이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러자 그것이 실제 이름인 것처럼 여기저기 자료에 인용되었다.

학술적으로 잘못된 인용이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다보니 이후 어떤 백과사전에까지 사임당의 이름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등재되어 일반인은 물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한국사를 강의하고 여러 권의 역사 베스트셀러 저자까지도 거기에 나와 있는 문헌적 오류를 정답처럼 그냥 그대로 베껴 방송하고 강의한다. 사임당의 이름을 ‘신인선’으로 쓰는 일은 오직 문학에서만 가능하고 또 무방하다. 학문에서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이 오류를 단순한 실수로 볼 수도 없는 것이 역사학자로서 조선시대 충효사상의 기본과 같은 기휘 풍습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사임당은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서당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가르쳤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한창 서당에 다닐 나이에 서당이 있을 턱이 없는 평창의 작은 마을에 살기도 했다. 스스로 자식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그리고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런 여성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율곡도 학문에서 자기의 스승은 어머니뿐이라고 말했다. 큰딸 매창은 어머니를 닮은 모습 그대로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막내아들 이우는 시·서.화·금(거문고)의 사절로 불릴 만큼 자식들마다 저마다의 소질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사임당은 우리 나이로 48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그토록 뒷바라지한 남편은 과거시험 소과 초시에도 오르지 못했다. 남편의 당숙 둘은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한 집안에서 은근히 라이벌로 여겨지던 남편의 사촌 하나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남편은 이들에게서 일 년에도 몇 교대로 돌아가는 계절직처럼 ‘아나, 이거나 받아라’ 하는 무관직의 품계 낮은 체아직을 얻고 또 50이 넘어서 영의정 당숙의 덕으로 국가에서 녹봉도 주지 않는 무록관직의 수운판관 벼슬을 얻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일곱 자식 가운데 혼기에 이른 자식이 넷이었는데 혼례를 치른 자식은 제일 큰딸뿐이었다. 28살의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부증을 앓았고, 어머니가 죽은 다음 32살에 결혼했다. 아직 어느 아들도 대과는 고사하고 예비시험 격인 소과에도 오르지 못했다. 셋째아들 율곡이 13살 때 처음 과장에 나가 치른 진사시험 초시에서 장원을 한 것이 살아생전 자식이 학문으로 보여준 결실의 전부였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사임당은 어떻게 눈을 감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다들 사임당이야말로 자식들의 성공을 다 지켜본 듯 여한이 없는 삶처럼, 또 자식교육에 성공한 삶처럼 여긴다. 율곡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눈을 감을 때 열여섯 살짜리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줄 알고 미리 자식교육에 성공한 부모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던 것이다.

애초에 사임당은 자신의 시대에는 여성 예술가로 평가되었다. 특히나 산수도에서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인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평가 받았다. 율곡의 어머니로 그렇게 평가 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시험 소과 초시에도 오르지 못한 ‘선비 이난수의 처’로 그런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것이 네 차례의 전란을 거친 다음 100년 후 이 땅의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서인 정치가들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야 산수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로서의 자리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를 낳은 오로지 현숙한 부인으로만 이미지 메이킹이 되었다.

나라의 사정이 위급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또 그 시대마다 모든 여성이 본받아야 할 군국의 어머니로, 해방 후 독재시절엔 세상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는 유순한 자식들을 길러내며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다하는 현모양처로, 그리고 입시지옥 속에서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한 교육의 어머니로 변해왔다. 그러다 보니 화장품과 막걸리와 학원과 의류 패션에 이르기까지 불법도박장과 유흥업소 말고는 사임당의 이름이 안 붙은 곳이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다들 허술하게 쓰지야 않았겠지만 ‘신인선’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여기 저기 잘못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다보니 자료라고 베껴 쓰고 인용한 부분들까지 오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또 한쪽으로는 남녀가 일곱 살만 되면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한 우물의 물도 마시지 않고, 특히나 열 살이 넘으면 여자는 마당 밖으로 나갈 수도 없던 시절을 배경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사임당의 자유연애 이야기를 하고 사랑 이야기를 그려야 그게 문학이고 예술의 요건인 양 포장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사임당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기본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삶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동안 사임당의 삶이 시대마다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만 그려졌지 그 인물의 삶을 사실에 기초하여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홉 살 때 시오리 들길을 걸어 오래전 퇴락한 어느 양반집 같은 오죽헌에 처음 소풍을 갔던 산골 소년이 스무 살 청년이 되어 다시 갔을 때 그곳 오죽헌은 정말 대궐만한 크기의 성역으로 변해 있었다. 그 십년 사이에는 또 어떤 변화들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까지 내용과 자료는 오류투성이인 가운데 그냥 대한민국 교육 이데올로기처럼 예로부터 겨레의 어머니로 무조건 훌륭하고 존경할 어머니여야 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현모양처로 정답이 정해져 있어야 하는 사임당의 삶에 대해 역사적으로, 또 문헌적으로 가장 정확하고 바른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들이 오히려 이제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임당의 삶에 대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책을 쓰고자 했다. 그래서 실제의 모습을 복원해내듯 그 시절 사임당의 삶과 생각을 사실과 가장 가깝게 그려내고 싶었다.

아홉 살 때 처음 오죽헌에 소풍을 가서 사임당을 만났던 소년이 이제 반백의 머리로 사임당의 삶을 다시 조명하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다.

2017년 새해아침 이순원

 

2 Comments

  1. 데레사

    2017-01-14 at 11:17

    이순원 작가의 글이군요.
    오늘 공부 했습니다. 율곡의 어머니 정도로만
    안고 있던 사임당에 대해 많은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2. cecilia

    2017-01-14 at 17:19

    유럽에서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경지에 이르는 사람을 말하는데 예술가에 대한 인식도 사실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한국이나 많은 것같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많은 불행을 자초하는지 정보를 전하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갖고 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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