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좀 부렸습니다.

일산 사는 아지매들이 모인 카페가 있는데 일산 아지매를 줄여 일지매라고 합니다.
나는 아줌마 범위를 조금 벗어난 할머니이긴 하지만 나이별 모임인 “잘 살아보세 50년대” 방에서 주로 놉니다. 아지매 카페에서 우리 나이 대를 무시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방을 따로 마련해 주어서  감사한데, 멤버가 많지는 않습니다. 한가한 곳이라 글을 올리고 보면 몇 개가 다 내 글일 때가 많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젊은 분들이 사용하는 방에는 일분에도 몇 개씩 글이 올라오고 하루에는 수백 개의 글이 올라와 다 읽기는 벅찹니다. 일산 아지매 식구가 20만 명이 넘으니 인구 100만의 도시 일산에서는 가장 활발한 커뮤니티 같습니다.
회원들이 지역에 골고루 살다보니 실시간으로 소식이 올라와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주말 대형마트의 교통 상황이나 마트가 복잡한 정도와 상품 정보도 있습니다. 식당 어디 가서 뭘 먹었는데 맛있다거나 반찬은 무얼 해 먹는지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정보도 있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난해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듣기도 합니다. 학원이나 교육정보도 쏠쏠합니다. 남편 얘기 시집 얘기 친구 얘기 등 소소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화재를 당해서 어려움에 처한 분을 일산 아지매들이 힘을 합해 돕기도 했습니다.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나서 아이도 다치고 엄마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치고 집은 타버렸으니 너무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분이 도와달라는 뜻이 아니고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했지만 극복해 보겠다는 의지로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급하게 가족들이 임시로 거처할 지하방을 하나 얻었다고 했는데 오래 비어있던 방이라 벌레들이 너무 우글거려서 사람이 기거하기 어렵더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 물건을 전해 주러 갔던 분 표현을 빌리면 전에 살던 분이 곤충기를 쓴 파브르였나 할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벌레들이 서식하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곳을 일지매 아지매들이 가서 청소랑 도배를 새로 하고 십시일반으로 커튼을 주신 분도 있고 외풍이 심하다고 방한 벽지도 도네이션 하더군요. 퐁퐁 같은 세제로부터 식료품 반찬 가재도구 이불 같은 것도 순식간에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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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준다는 분이 아무리 많아도 그걸 수거하여 배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인데, 그야말로 오지랖이 넒은 어떤 분이 생업을 미뤄가면서 물건을 수거해서 배달까지 하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남의 어려움에 동정을 표하긴 쉬워도 발 벗고 나선다는 것은 웬만한 맘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남이 하지 못하는 힘든 일을 하고도  칭찬만 받는 게 아니었습니다. 20만이 넘은 회원들이 있다 보니 그걸  비난하는 분도 간혹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울 사람이 그 사람 한 사람뿐이냐? 너무 나대는 것 같다. 다른 무슨 마음이 있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위한 비난인데  기분이 몹시 나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워낙 명랑한 분이라 잘 극복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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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라진 틈에서 한살림이 거뜬히 차려지는 것을 보며 십시일반의 위력을 볼 수 있었고, 아무리 각박한 현실이지만 이런 인정이 살아 있구나 하는 흐뭇함으로 이일의 시종을 지켜봤습니다. 오지랖 넓은 분은 글도 잘 썼고 기획력과 파워도 느껴졌습니다. 글에 ㅋㅋㅋ이나 ㅎㅎㅎ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분의 모습이 환하게 그려집니다. 이런 분이 있어 사회의 온기가 느껴지고, 지역 커뮤니티의 힘을  알 수 있었습니다.

ㅅㅂㄴ이 무슨 약잔지 아세요.
당연히 젊은 여인들이니까 서방님의 약자로 쓰는 것 같지만 어느 날 욕으로 쓴 것을 발견하고 그 발랄함에 혼자 웃었습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거나, 돈을 탕진했다거나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 같을 때 몹시 화가 나잖아요. 그럴 때 ㅅㅂㄴ이라고 쓰고 ㅅ ㅣㅂ ㅏ ㄹ ㄴ ㅗ ㅁ으로 읽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욕은 하면 안 되지만 그걸 발음 나는 대로 읽으면 시원한 뭣도 있잖아요? ㅎㅎㅎ 익명을 사용하여 커뮤니티에 화를 쏟아 놓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 것도 같거든요. 그런 글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주고 위로의 댓글을 답니다. 이런 커뮤니티 활동으로 공감 하고 위로하면서 익명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문화입니다.

조류독감 파동으로 계란값이 갑자기 너무 올랐을 때 “허세 좀 부렸습니다.” 하는 글을 클릭했더니 계란 프라이를 두 개나 해서 드신다고 하더군요. “계란 한판을 샀을 뿐인데”라는 글에는 “계란 한판 사서 집에 들고 오는데 지나가던 처음 본 아주머니들께서 그거 얼마 줬냐고 자꾸 물어보시는 거 있죠~ 좋은 백 하나 사서 들고 가는 거 같았어요.” 이걸 읽고 저 혼자 빵 터졌어요. 젊은 분들의 발랄함에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시간 나면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렇게 익명이 보장된 공간에서도 나는 익명을 사용하는 일이 익숙하지 못합니다. 일지매에 가입할 때 20년 넘게 사용하는 순이라는 인터넷 아이디를 쓰려고 했으나 누가 이미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손자만 넷”이라는 아이디를 익명이라고 사용합니다.

3 Comments

  1. 김 수남

    2017-03-01 at 00:43

    네,일산이 참 좋습니다.일지메!여기도 너무 따뜻한 분들이 함께 계시고요.익명으로 쓰는 곳의 장단점이 있는데 모두 장점을 잘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아름답고 생산적인 많은 일들을 십시일반의 힘으로 계속 멋지게 해 나가시는 일산 시민 분들 되시길 기대합니다.다른 도시로도 좋은 영향력이 퍼져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시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한국 가면 제일 먼저 공항서 바로 일산으로 갔는데 이제 양가 부모님이 다 안계시니 형제들이 있어도 고국 방문의 간절함이 덜해집니다.아버님과 함께 청계산과 일산 호수를 산책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버님 떠나신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언니는 어머님께서 아직 곁에 살아 계심이 너무 뵙기 좋습니다.더욱 건강하셔서 오래 함께 지내실 수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2. 데레사

    2017-03-01 at 01:45

    일지매,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나도 한번 구경하러 가야겠습니다.
    어떻게 들어가나요?

    무슨일이든 남이 하면 말도 많고 탈도 많지요.
    우리가 조블에서도 겪었잖아요?
    일일히 신경쓰다가는…. ㅎㅎ

  3. 석초

    2017-03-01 at 03:51

    오십여 년도 훨씬 넘는 얘기 입니다.

    제가 봄방학을 맞아 집에서 육촌 동생과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포에 사는 친척이 낯선 귀부인과 함께 저희집에 왔습니다.

    그 귀부인은 치럴치렁한 밍크코트에 곱게 생긴 것이 부잣집 마나님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목포에서 중선배를 여러 척 부리는 내노라는 부잣집 마나님이였습니다

    동네 아낙들이 그 녀의 밍크 코트를 구경하려 몰려왔습니다.

    수다를 떨던 중에 그 부인이 목포에서 열리는 욕 대회서 장원을 했다고 했습니다.

    욕을 해보라는 아낙들의 청에 그녀는 젊잖을 빼며 사양했습니다. 계속되는 성화에 못이긴 척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고은 얼굴에 욕과 밍크코트. 젊어서는 여고 선생을 했다는 그 녀의 모습은 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묘한 앙상블을 이루었습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육촌동생의 어머니인 당숙모가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82☜…△\○}`☜\△|}☆■>○\……………”

    숨도 쉬지 않고 내 뱉은 욕이 속사포처럼 쏟아졌습니다.
    내 옆에 있던 육촌 동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 부인 왈

    “ㅆㄱㅌ에 ㅃㅈㄴ. 이건 예술이다! 예술”

    ㅅㅂㄴ은 그들이 하는 욕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그 귀부인의 기를 팍 죽인 그 여인이 내 작품 “당숙” 주인공의 부인입니다.

    그 당숙모의 욕을 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욕을 들으며 고단한 삶을, 한을 삭혔는지도 모릅니다.

    그 당숙모가 얼마전 소천했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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