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30여 년 전 시골에 사는 친척 집을 갔을 때 일입니다.

방안에 밥상을 두 곳을 나눠 차리고 손님으로 간 우리까지 남녀로 나뉘어 온 식구가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아주머니께서 부엌에 가서 숭늉을 큰 바가지에 가득 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무쇠솥에 지은 밥을 푸고 나면 솥 밑에 누룽지가 남게 됩니다. 거기에 물을 부어 두면 남은 열에 의해 밥알이  불어서 일어나 밥주걱으로 솥을 긁으면 구수한 숭늉이 됩니다. 그걸 식후에 한 사발 들이키는 것이 우리나라 식 애피타이저입니다. 숭늉을 주시려나 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바가지 밑에  국그릇으로 사용한 대접을 받쳐서 넘어지지 않게 해 놓으시더니 다락문을 열고 여러 가지를 꺼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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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숭늉 바가지에다가 외국산 커피 봉지를 양손으로 중간쯤 눌러 잡고는 거꾸로 들고 커피 가루를 바가지에 들이붓습니다. 그다음 순서로 3kg짜리 설탕 봉투에서 아주머니가 방금 식사를 마친 밥공기로 설탕을 푹 퍼서 넣습니다. 프림도 병 채들고 눈대중으로 적당량을 들이부으면서 한 손으로 밥숟가락으로 저어 가며 간을 봅니다. 늘 하던 일인 듯 익숙한 모습으로 눈대중만으로도 그 많은 커피를 탔습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타면서도 커피의 양이나 설탕이나 프림을 넣을 때 적거나 많거나 할까 봐 조심스러울 때라 아주머니의 행동이 아주 유쾌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가 숟가락으로 서너 번 간을 보고 설탕을 더 넣어 휘휘 저으시더니 커피를 식구들 밥그릇에 아주머니 밥그릇으로 떠 줍니다.

내가 먹고 난 밥공기에 담긴 커피는 달콤하고 구수하고 쓰기도 했지만 아낌없이 쏟아부은 커피가 쓴맛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 떼어먹지 않은 밥풀과 숭늉이 동동 떠다니는 커피는 특이하고도 맛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아랫목에서 누룽지가 간간이 씹히는 구수한 커피는 마셔본 분만이 맛을 논할 수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커피 맛이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입니다. 커피가 비싸고 귀하던 시대에 커피를 그렇게 통 크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은 그 댁 따님이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서 살면서 그곳의 특산품이 커피라 보내온 것입니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위해 파라과이에서 제일 좋은 커피가루를 소포로 보낸 것입니다. 지금처럼 커피문화가 발달된 시대가 아니어서 어떻게 마시나 고민을 한 그 댁 아주머니는 그렇게 기발한 커피 레시피를 창조해 낸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발한 커피와 밥공기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밥공기는 커피를 따라 마시기엔 조금 크긴 했지만 컵 대용으로도 괜찮았습니다만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손님 대접을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며 커피 잔이라도 꺼내지 그랬냐고 나무랐습니다. 방 한편 장식장 속에는 법랑 냄비와 커피 잔 그릇들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쁜 컵은 장식 용일뿐이지 사용하기엔 버거운 물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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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위불에서 컵 이벤트를 해서 새로운 컵이 도착했습니다.

김남조 시인의 시가 쓰인 컵은 커피나 물을 담아 먹기엔 아까운 것이라 기념으로 컴퓨터 책상 앞에 두고 보려고 합니다. 시가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같은 귀한 경구가 새겨진 컵을 보면서 매일 새롭게 너를 위하여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컵에 새겨진 시의 전문을 인용합니다.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

​가만히 눈 뜬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와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나의 사람아

​눈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2 Comments

  1. 데레사

    2017-03-19 at 10:18

    컵 받으셨군요.
    좋으시죠?

    커피가 귀하던 시절, 우리도 흔히 밥그릇에다
    타먹기도 했어요. 지금이사 그런식이 웃음거리가
    될수도 있지만 그 시절엔 그랬지요.

  2. 김수남

    2017-03-20 at 11:36

    어머,언니 축하합니다.드디어 머그 컵이 도착했네요.싯귀가 참 좋습니다.의미있는 컵이라 막 쓰기는 조심스러울 것 같아요.저도 여러 컵 중에 귀하게 잘 챙겨 사용하려고합니다.
    저를 위해 특별한 수고를 이번에도 기꺼이 해 주심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도 받으면 바로 소식 전하겠습니다.

    언니의 커피 추억 정말 옛날 이야기처럼 구수합니다.
    저는 시골서 자랄 때는 커피를 마셔 본 적이 없었어요.지금도 그리 즐기진 않는데 손님이 오실 때 카페에서 종종 마시고 주일엔 한 잔씩 꼭 마십니다.

    여기는 절기 때는 교회서 준비하고 결혼같은 행사가 있어서 성도님이 특별히 대접하는 주일 외는 거의 매 주 빵과 커피로 친교시간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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