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혈통이 나쁜 이유( 프라도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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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미술관 중에 하나라는 프라도 미술관을 가 봤습니다. 가 봤다고 말하기도 아쉬울 정도로 미술관의 내부를 들어갔다가 나온 정도입니다. 미술관에 그림이 3000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딱 4개의 그림만 봤습니다.
우리를 인천 공항에서 인솔한 인솔자 외에 현지에 가면 현지 가이드가 따로 있습니다. 리스본에서는 리스본 가이드가 안내를 하고 프라도 미술관을 갈 때는 마드리드에서 가이드가 나옵니다. 이분은 마드리드에서 20년 넘게 사셨다는 중년 여인이었는데 입담이 무척 좋았습니다. 딱 한 시간을 정해놓고 전시관을 둘러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마저도 시간을 아껴서 봐야 하는데 가이드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한 시간을 자유롭게 전시관을 돌아보는 방법 한 가지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몇 점만 보는 것, 이두 가지 방법 중에 후자를 택했습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그다지 취미도 없어서 그냥 가이드가 알려주는 것만 봤습니다.

프라도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인증샷 ^^
그 한 시간 중에도 현지 가이드가 미술 설명을 하다가 “ 아 내 가방!” 하더니 로비로 뛰어갔다 오고 하는 시간도 포함됩니다. ㅎ 소매치기가 어찌나 많은지 열흘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가방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한 꼭지 쓰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다음 일정을 포기하고 미술관을 더 구경하다가 저녁 호텔로 가겠다고 의견을 제시해 봤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단체여행에서 이탈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 우겨볼 용기도 없었습니다. 파반느2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작품 4점을 겨우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몇 점의 그림이라도 본 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자라서 누구랑 결혼시키겠다고 정해놓고 기른 시대도 있었습니다.
공주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남동생(삼촌)이자 사촌 형제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레오폴드 1세와 결혼시키기 위해 공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길러졌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등장한 예쁜 소녀가 이 마르가리타 공주입니다. 이 그림은 소설가 박민규 씨가 지은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책 표지로 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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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왕궁 앞에서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가 공주의 초상을 꾸준히 그린 것은 공주의 초상을 정기적으로 그려서 오스트리아 왕실에 보내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이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사 박물관에 여러 점 소장돼 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초상화들을 자세히 보면 아래턱이 위턱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있습니다. 공주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의 초상에서도 앞으로 돌출된 턱이 보입니다. 유명한 “합스부르크 주걱턱”입니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왕실은 모두 음악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낳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11세기에 스위스에서 시작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신들이 유럽 최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귀한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를 모두 가문 안에서 정했습니다. 마르가리타 공주 또한 예외 없이 자랄수록 주걱턱이 되어 아기 때 모습하고는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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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걱턱뿐 아니라 수명도 짧아서 마르가리타 공주도 22살에 죽었습니다. 부와 권력을 타 가문과 나눌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욕심이 이런 비극을 낳게 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손들은 거듭된 근친결혼으로 같은 유전자만 계속 이어받게 되다 보니. 자손들이 허약해서 대부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펠리페 4세는 두 번 결혼해서 아이 13명을 얻었으나 그중에서 열 살을 넘긴 아이는 세 명뿐이라고 합니다. 펠리페 4세가 아홉 번째 아이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를 애지중지했던 것도 그 위 아이 8명 중 일곱 명을 이미 잃은 후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정의 시녀들
시녀들 (벨라스케스) 구글이미지
 〈시녀들〉(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은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가장 많이 연구된 서양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을 그린 것이며,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몇몇 인물들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몇몇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왕녀를 담당하는 시녀들,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장이가 에워싸고 있다. 그들 바로 뒤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큰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 내부의 공간을 넘어 이 그림을 감상할 누군가가 자리할 캔버스 밖 저편을 바라보고 있다. 배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으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상반신이 보인다. 이 왕과 왕비는 감상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내부가 아닌 바깥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 속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으며, 19세기 토마스 로런스 경은 이 작품을 ‘예술의 철학’이라고 일컬었다.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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