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척일까? 사치일까?

나는 음악과 아버지가 하나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나이 먹을수록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 옛날 가난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마을에 통틀어 몇 명 안 되는 시대였고 교인들이 교회를 드나드는 일을 무슨 레지스탕스 운동하듯이 남들이 알까 쉬쉬했습니다, 주일날 성경책 들고 다니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서 비료포대 같은 종이에 둘둘 말아 위장을 하고 교회를 출입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분들이 교인이었기에 찬송을 불러도 흥이 날 리 없고 한탄조의 곡조로 노래할 때가 많았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이런 가사의 노래를 길게 늘여서 부르다 보면 어린 아이였던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절로 났습니다.

그와 다르게 우리 아버지는 찬송을 성악가가 노래하듯이 부르는 것을 즐겨 하셔서 집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찬송가를 양손으로 잡고 서서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좋은 목소리로 노래 부르면 오빠와 나 여동생들이 아버지 발아래 앉아서 아버지의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땐 왼손을 펴서 찬송가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지휘했습니다. 아버지는 노래가 잘 되는 날에는 더욱 크고 우렁차게 부르셨습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부분을 따로따로 부르기도 해서 우리는 같은 노래가 달리 불리는 것을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할머니나 어머니가 안 계신 시간에 아버지의 리사이틀이 있었는데 어쩌다 밖에서 찬송 소리를 듣고 들어오신 할머니는 질색을 하시며
“야~야 저 밖에까지 들린다. 조금 작게 불러라~ 온 동네가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냐? 남들이 들으면 뭐라 하겠냐?” 이러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커다란 노랫소리가 담 너머로 가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들 농사일로 바쁜 시골에 살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일 만으로도 환영받지 못하는데 베짱이처럼 노래만 부르는 아버지가 마땅치 않으셨을 할머니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노랫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면 부끄러운 일인가 보다 하는 감정은 그때 생겨났습니다.

아버지는 하모니카도 잘 부셨는데 여름날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서 아버지의 하모니카 반주에 따라 동요를 합창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와 책 읽고 공부하고 노래 부르고……. 몸이 약해서 노동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와 우리는 어린 시절을 아주 풍요롭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에겐 더없이 좋은 분이었지만 그 당시 정서로는 이해받기 어려웠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라 사람은 근로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불성실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음악은 사치이고 생활에 필요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노래는 새마을 운동가처럼 새벽 종이 울릴 때부터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하는 격려가 여야 하는데,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이런 것은 허황된 노래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80년대 초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았는데 나는 집에서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음악 테이프를 사들이고 그걸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사막으로 유배를 간 것처럼 남편이 출근하고 난 후에는 오로지 책과 며칠 묵은 신문 그리고 음악으로만 긴 하루를 때웠습니다. 그때 장만한 좋은 전축은 큰 아이를 낳고 귀국했을 때 나에겐 가장 값나가는 살림이었고 보물 1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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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뒤로 전축 보이시나요? 저 전축을 무척 아꼈습니다. 내 성향과는 어울리지 않게 레이스로 만든 보자기를 씌어 예쁘게 장식하고 먼지 들어갈세라 늘 닦고 전선을 손봤습니다. 스피커의 방향이 틀어질까 각도를 조절해 가면서 음악을 듣곤 했습니다. 사람의 몸뿐 아니라 가전제품도 컨디션이 있어서 짹 부분의 습기나 먼지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어 연결하면 더 좋은 음을 내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길로 계속 갔으면 나도 음악보다 음향기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오디오 마니아가 될 뻔도 했습니다.
그렇게 전축을 애지중지했는데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고부터는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휴대폰으로 유튜브 영상까지 쉽게 보고부터는 전축은 소용에 닫지를 않았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이 집안 가장 중앙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과해 보이고 거슬리더군요. 뭘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일단 창고로 보냈다가 몇 년 후에 습기도 차고 고물이 되어 쓸 용도가 없어서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버렸습니다. 전축을 사랑할 때는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조금 더 원음에 가까운 것으로 하면서 기계를 바꿔가며 사들였는데, 그 아끼던 것을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서 버리게 될 줄이야…….

어느 시기 어떤 연유에 의해 기쁘거나 행복한 그리고 슬프거나 아프게 새겨질만한 순간을 우리는 경함하며 삽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발생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떠올리기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나뉘어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자리 잡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종종 좋거나 싫은 것 자체가 무뎌지는 경우도 많고 작은 일들이 크게, 큰일들이 작거나 아예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합니다.
내 마음속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떳떳지 못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요즘 생활환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슴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어린 날 할머니가 아버지 노래를 부끄러워하셨던 감정이 내게 이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상대방에게 잘 난척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농사철에 남들은 논에 나가 일할 때 노래만 부르셨던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할머니의 마음과 아버지의 삶에 부조화가 나를 제재하는 탓일 겁니다.

기억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자격지심이나 부끄러움 미안함 이런 것은 과거 기억에 의해 비교되어 일어나는 현재의 감정이 아닐까 합니다.

3 Comments

  1. 데레사

    2017-07-14 at 16:21

    어릴때는 공부 잘하는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공부 잘해서 우등상 상장 한장 받아가는 딸래미
    보다는 운동회때 달리기 잘해서 공책이나 연필 타가는 이웃
    아이들이 더 좋아 보였던 거지요.
    가난하게 살았기에 그런 생각을 한것이라고 이제사 이해를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시는 아버님을 대하는 할머니의 마음도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2. 김수남

    2017-07-15 at 12:10

    네,언니! 정말 훌륭한 목사님 아버지를 두셨습니다.찬양을 그렇게 잘 하시고 좋아하시던 아버님은 남들이 미처 체험하지 못한 큰 사랑을 체험하고 아셨기 때문이시겠지요.찬양이 아무 때나 그렇게 나오시는 것이 아닐텐데 항상 즐겨 찬양 하신 모습만 뵈어도 심중에 진실함과 하나님 향한 간절한 간구와 믿음의 표현이 대단하셨던 분이십니다.그래서 언니도 이렇게 또 하나님 믿는 믿음 안에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시고 자녀들도 믿음으로 잘 키우셨다 생각합니다.살아 가실 수록 점점 더 많이 그리워지시겠어요.목사님의 찬양 소리가 저도 들리는 듯 합니다.귀한 믿음의 가정 이야기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3. silhuette

    2017-07-28 at 12:48

    최수니님 조불에서는 블로그 메인 사진에 email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요즈음은 못보겠네요. 제 주소가 jdshin1044@hanmail.net입니다.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데 주소를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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