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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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버스에 탔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내리기 쉽게 출입문 근처에 섰습니다. 마침 의자에 앉았던 할아버지가 버스카드를 손에 쥐고 내릴 채비를 하느라 자리에서 들썩 거리 시기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요. 일산 경찰서 앞에서 버스를 타면 다섯 정거장 만에 내리는 짧은 거린데도 의자에 앉으면 행운처럼 여겨져서 기분이 좋아요. 택시도 아니고 1250원짜리 버스를 탔는데 앉아서 갈 수 있으면 잠깐이지만 너무 좋은 거지요. (자차가 없는 사람은 공감되실까요?^^)
기대와 달리 할아버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자세를 고쳐 앉더라고요. 내릴 때가 안 되셨나 보다. 생각하고 혼자 의자에 앉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 멋쩍어서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고개가 푹 꺾이며 깊이 주무시더군요. 잘못하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고꾸라질 것 같이 위태하게 꾸벅 거리더니 정거장 하나를 지나 두 번째 버스가 정차하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여기가 어디야?” 하면서 두리번거리시기에 컨벤션 고등학교라고 말씀드렸더니 “아이코 지나왔네” 하면서 허둥지둥 내리는 데 다칠까 봐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다음 정거장에 내리실 분이 내릴 정거장을 앞두고 그렇게 깊이 잠드신 거잖아요? 본인도 모르게 깜빡 혼절하듯이 잠이 드는 분을 보니 노년엔 생각지 못한 위험한 일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제는 친구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 끝에 잠 이야기를 했는데 한 친구 어머니가 말년에 불면으로 고생하셨답니다. 어머니는 밤이면 잠이 안 와서 힘들어하셨는데  친구가 보니 짬짬이 주무시는 때가 많아서 밤에 통잠을 못 주무신다는 것뿐이지 수면부족은 아닌 것으로 보였답니다. 텔레비전을 보시다가도 코를 골며 깊이 주무시는데 한숨 주무시고 깨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왜 이렇게 잠이 안 오는지 모르겠다.” 이러셔서 “어머니 여태 코 골고 주무셨어요.”하니 “내가 언제 자?” 라시며 억울해 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깜빡 잠이 드는 것은 본인이 인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년이 되면 수면 패턴이 좀 이상해지나 봅니다.

나도 잠이 많은 사람이라 누구 흉볼 처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음악회에서는 졸지 않았으니까 음악회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이 참 싫었어요.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경화 바이올린 연주회가 있어서 비싼 티켓을 사가지고 갔을 때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커서 객석이 많기도 하고 음향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별러서 가는 연주회를 만족하게 보려면 좋은 좌석을 골라야 하고 좋은 좌석은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인데도 아주 비싼 티켓을 사가지고 갔는데 내 앞에 앉은 분이 좌우로 고개를 움직이며 졸아서 시야를 방해했습니다. 옆에서는 코를 골고 주무셔서 그 옆에 앉은 부인이 깨우느라 꼬집고 소근 대는 모습도 음악을 듣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자고 싶으면 집에서 주무시지 뭣하러 비싼 돈 내고 좁은 의자에 앉아서 힘들게 자면서 남에게 방해할까 하면서 속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 비난이 나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인가? 겨울에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아람누리에서 듣다가 나도 모르게 졸았습니다. 병원 회식에 참석해서 식탐이 많은 나는 음악회 생각도 안 하고 잔뜩 먹었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음악회장에 앉아 있자니 공기가 따뜻하기도 하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앉았으니 나도 모르게 잠이 쏟아졌습니다. 잠에서 깜짝 깨고 보니 연가곡 서너 곡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음악회도 못 오겠구나!

친구들이 다 같이 나이 들어가면서 노후의 증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깜빡 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어휘를 잊어버려 말할 때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복잡한 것이 싫고, 새로운 것에 적응이 잘 안되고…….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분이 이러는군요.
“이런 말 들으면 난 참 위로가 돼, 나 혼자 그런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동지가 있으니 참 좋다.”
네 맞아요. 같이 나이 들어가며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위로가 되고 행운이고 커다란 복 이예요.
위로가 얼마나 되는지요!

친구가 해 준 이야긴데 이건 보너스예요.
할머니 셋이서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래요.
첫 번째 할머니는 층계가 많은 계단 중간쯤에서 다리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보니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더래요. 계단을 올라가다가 쉬었는지 내려가던 참이었는지 쉬다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두 번째 할머니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침대에 누우려고 했는지 일어나려고 했는지 모르겠더래요.
세 번째 할머니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는데 버스를 타려고 그곳에 갔는지 버스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랍니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토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글로 옮겨 적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고 난다고 해도 내 속에서 엉터리로 만들어 내는 느낌입니다.)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 같지만 저도 그럴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지금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웃지 못 할 때가 오면 큰일이지요?^^ 그렇지만 내가 이럴 때도 “나도 그래”하고 공감해 주는 친구가 있는 한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친구들이니까요.

3 Comments

  1. 데레사

    2017-09-28 at 16:39

    어디서든 잠이 오는건 안 오는것 보다
    좋지요. 며칠 불면으로 시달리면 정말
    만사가 다 귀찮아지거든요.
    늙는다는건 서럽지만 같이 늙어가는 친구가
    있어서 덜 외롭기도 해요.

  2. 윤정연

    2017-09-29 at 10:36

    수니님도 그렇다니 내가 혼자만이 아니구나!!! 안심이 되네요 ㅎㅎㅎ 정말 이상하게 대화를 하다보면 어휘가 얼른 생각이 않나서 얼브므릴때가 있어서요…친구들이 70대 중반,후반이
    되어가니 그런갑다 하고 서로 웃으며 지나간답니다…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건강을 지킵시다~~**

  3. 비풍초

    2017-10-01 at 04:38

    옛날에는 잘 참았는데요.. 화도, 소변도, 졸음도, 등등…
    이젠 잘 못참게 되던데요…
    운전할 때는 그래서 특히 조심하게 되지요..
    그래서 점점 더 피하는 게 많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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