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공원 담벼락에 붙은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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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담벼락에
“이번 추석 연휴에는 입시, 취업, 결혼에 대해 묻지 말고…….”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글귀라 누가 썼는지 다음엔 무슨 내용인진 모르겠습니다.
차를 함께 타고 가던 딸은 못 본 것 같았습니다.
“입시 취업 결혼 이런 것은 추석 가족모임에 묻지 말라는 내용이 현수막으로 붙기도 하네…….” 혼잣말을 했더니 우리 딸이
“친척들이 모이면 이상하게 남의 상처를 건드리니까 그러나 봐요.“라고 합니다.
“친척들이 걱정이 되니까 그러겠지, 일부러 상처 주려고 그러겠어?”
“어른들이 말하기 쉽다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 당사자가 더 힘든데 말할 건 아니지?”
“엄마도 외삼촌 만나면 은이 걱정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34살 된 조카를 고모가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걱정하겠니?”
“걱정을 해서 말씀하는 것은 맞지만, 매번 그 말을 듣는 은이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몰라서 시집을 안 가는 건 아니잖아요?”
” 맞아! 나도 알긴 아는데, 은이를 보면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온단다. 말로 해야 소용없고 듣기 싫을 건데. 나도 조심해야지.”

결혼해서 애 없는 집을 보면 저간의 사정은 알아볼 생각을 안 하고 ‘아기 빨리 낳아야지’라고 재촉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있는 아들에게는 ‘왜 취직 안 하냐?’고 묻고. 결혼이 늦어진 사람에게는 ‘노처녀가 되도록 시집 안가냐? 못 가냐?’ 하면서 남의 아픈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사실 본인이 더 괴롭고 힘드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점점 더 위축되고 위로는 안 되는 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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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는 긴 연휴라 딸 가족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놀러 간다고 하면서 한이에게 아디다스 검정 운동복 바지를 입혔더라고요. 매일 크는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처음 보는 추리닝인데도 바지가 아니라 타이즈를 신은 것같이 작았습니다. 그러니 모양이 별로 예쁘지도 않고 촌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못 본척했으면 좋은데 괜히 참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얘 한이 딴 옷 입혀라, 어디 촌 애 같다.”
난 딸만 키워서 그런지 남자 아기들이라도 손자들을 예쁘게 입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엄마는~ 뭐가 어때? 귀엽기만 한데” 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이럴 때 알아들었어야 하는데
“옷이 두껍고 애한테 작잖아. 예쁜 옷 다 놔두고 왜 모양 빠지게 이런 옷을 입혀?”
이랬더니 딸이
“엄마가 골라 입혀줘” 이러는데 어쩐지 당황해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기 옷장에서 옷을 골라 한이와 까꿍이에게 입혔습니다.
사위가 가방을 들고 아이들과 먼저 내려가고 난 후 딸이 나에게 이러는군요.
“ 엄마 그 추리닝 시어머님이 사주신거야. 이서방 듣는데 그러면 어떡해?”
“아하! 그래서 네가 곤란해했구나. 미안 미안”

할머니가 손자 입히라고 사서 보낸 옷을 이서방 듣는데 “촌 애” 같다고 했으니 내가 참 주책이지요. 의도한 바는 없고 나쁘게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서방으로서는 듣기 싫었을 겁니다.
만약에 역할이 바뀌어서 며느리 친정어머니가 사 보낸 옷을 시어머니가 촌스럽다고 했으면 싸움이 났을 일이지만 그래도 딸이니까 우호적으로 풀었습니다.
사위에게 “어머니가 사 보낸 옷인 줄 몰랐어. 애들을 예쁘게 입히고 싶어서 말이 너무 앞섰네.”라고 했더니 사위는 그게 무슨 사과할 거리가 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군요.
사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느끼는 사소하고 미묘한 감정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래도 내가 시어머니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가 아마 시어머니였으면 잔소리하다가 미움께나 받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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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되니 추석 연휴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말 조심을 해야하겠습니다.

3 Comments

  1. 데레사

    2017-10-03 at 13:34

    맞아요. 말조심 해야됩니다.
    생각해 준다고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비수가
    되기도 하거든요.
    저도 조심한다고 해도 실수를 더러 합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2. 김 수남

    2017-10-03 at 21:06

    언니! 한이랑 까궁이 그 사이 정말 많이 컸네요.한복 입은 의젓한 모습도 귀여운 흰티랑 검정 바지도 ,목욕하는 모습도 모두 너무 사랑스럽습니다.저희 위의 두 아들 연년생으로 키울 때 모습이랑 비슷해요.

    언니 해 주신 그 말씀 저가 앞으로 며느리 볼 사람으로서 잘 새겨 둘게요.

    행복하고 은혜 가득하신 추석 명절 되세요.살롬!

  3. 이길영

    2017-10-05 at 12:36

    우리같은 중노인들은 앞뒤로 낀세대라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보고도 못본척, 듣고도 못들은척, 말은 가급적하지 않아야 명절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 옵니다. 저도 아들네 식구가 와서 지내는 바람에 응접실을 빼앗기고 내방에 틀여박혀서 책이나 읽고 internet이나 뒤지면서 소일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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