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호수에 나가 꽃수레를 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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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지나가면 시댁과의 갈등으로 우울증을 겪는 주부들이 많다고 합니다.
나도 젊었을 때 시댁의 풍습이 너무 생소해서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친정은 할머니 때부터 믿어온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가 없었는데 시댁은 12대 조상까지 제사를 갖추는 유교 집안입니다. 어느 달에는 제사가 두세 번 있기도 하고 일 년 열두 달 제사가 없는 달이 없었습니다. 시어머님이 계셔서 내가 주도하는 일은 아니지만 명절 제사에 참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시댁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 언어가 다른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는데, 새댁에게 시댁은 같은 언어를 쓰는 외국 같았습니다. 아니 텔레비전 사극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해 1월에 시할머니 초상이 나서 장례를 치르는데 장장 9일장을 하더군요. 국상이 난 것도 아닌데 구일장이 웬 말이냐고, 비난의 소리가 높았지만 집안 어른들은 좋은 날을 택하다 보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결혼식에는 길일을 가려 하는 것을 들어봤지만 무슨 장례식도 길일을 택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평소에도 남존여비가 심한데 제사 지낼 때는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남자 어른들은 제사상이 차려진 사랑채 방 안에서, 젊은 남자들은 마루에서 여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뒷마당에 멍석을 펴 놓고 그 위에서 절을 했습니다. 남자는 절을 두 번하는 동안 여자는 네 번 해야 합니다. 아침상식은 먼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에 밥을 새로 짓고 반찬을 해서 차려놓고 하얀 싸락눈이 덥힌 멍석 위에서 절을 합니다. 유교의 전통은 공자가 만들었다고 배웠기에 이런 제사 풍속을 만든 공자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시모님을 비롯한 대소가 안 어른들은 불평 없이 평생을 해 오셨지만 젊은 세대는 추운 데서 입김을 불어가며 멍석 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시할머니 장례를 치를 때 대문간 옆에 살던 수달네라는 할머니가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수달네는 집성촌에 들어온 이방인으로 근본이 상민이라 양반 동네에선 애들도 그 할머니에게 반말을 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나는 하인을 부려본 적도 없고 상민은 이조시대 사극에나 있는 줄 알았기에 수달네 할머니를 어르신으로 대했습니다. 난 서른이었고 수달네는 80세가 넘은 할머닌데 어른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습니다. 시모님은 나에게 “아랫것들에게 그렇게 대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수달네는 나에게 새아씨 아니면 서울 아씨라고 시대에 맞지 않은 호칭으로 불러서 적응이 안 되었습니다. 어른과 연장자 등의 구분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양반 상놈 하는 풍습은 못마땅했습니다.

80을 넘긴 수달네는 장례의 주인공인 시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몸종이었습니다. 나이가 차자 동네 나이 먹은 남자와 결혼시켜 할머니 댁 문간방에서 70년 넘게 한 울타리 안에 살았습니다. 애들도 수달아, 수달아 하고 함부로 부르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자녀도 없이 수달 네만 남아 시할머니와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택호도 없이 그냥 남편의 이름을 따라 수달네라고 불리며 살았습니다. 수달네는 평생 의지하고 바라보고 살았던 주인이 돌아가셔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할머니의 그늘에 살아서 수달네는 누구보다도 시할머니의 죽음을 힘들어했습니다. 수달네는 많은 문상객들이 몰려와 부엌일에 바쁜 중에도 화를 내고 투덜거리며 말을 거칠게 쏟아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하루에 세 번 먹는 돌아가신 분의 끼니를 챙기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식 제사를 지내는 집안사람들의 위선을 비웃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밥상을 저렇게 차려드리지 돌아가신 다음에 무슨 소용이야?”라고 투덜거리면 집안 어른들이 눈을 부라리며 나무랐습니다. 노인 답지 않게 목을 자라목처럼 쑥 들이밀고 혀를 날름 했습니다. 그러면 나잇값도 못한다고 야단을 치는데, 그때뿐 다시 심술을 부렸습니다. 꽁꽁 언 뜨락에 볏짚으로 만든 짚방석 위에서 여자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절하는 모습을 수달네가 혀를 끌끌 차며 비웃자 어떤 어른분이 강아지를 쫓아내듯 손을 휘둘러가며 “안 가냐”라고 소리치자 안채로 쫓겨 들어가는데 그 뒷모습이 몹시 우습기도 하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안어른이라고 해도 수달네보다 나이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할머니가 친정에서 함께 온 하인이었으니 할머니의 아들들 그러니까 시부님 형제들을 기른 분입니다. 낳기는 할머니가 낳았지만 수달네의 조력으로 큰 사람들과 결혼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당당하게 “근본이 없고 본데없이 살아서 …….”라고 했는데 근본은 모르겠지만 평생을 이 집안에서 살았는데 그 말이 맞지 않았습니다. 맡은 역할이 사람들에게 치이고 구박받는 것이라 하인의 역할극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도 나에게 가장 우군이 수달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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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당시까지 하인이 존재하는 것도 신기하고 제사 풍속도 신기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집 풍속에 이상한 것과 부당한 것이 많았지만 잠깐씩만 견디거나 구경(?) 하면 되는 일이라 시댁의 제사 풍속을 해외문화 탐방을 가서 이국 문화를 낯설게 바라보듯 시댁 문화 탐방의 기회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며 견뎠습니다.

신혼 초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살았는데, 기도 시간이 되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도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카펫을 펴 놓고 메카를 향해 무릎을 꿇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모래벌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고속도로 갓길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들이 석양 속에서 절을 하던 모습이, 흰 광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볏짚으로 만든 똬리를 얹고 절하는 모습이 닮아있었습니다. 거기는 사막이 배경이고 이곳은 시베리아처럼 춥다는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매장 날짜를 길일로 하느라 9일장을 하는데 하필이면 그해 겨울 중에 가장 추운 날이었습니다. 장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었고 내 생애를 통 털어서 그렇게 추운 날씨는 처음 봤습니다.
하인도 장례도 제사도 부엌 바닥에서 밥 먹던 일도 다 지나간 세월이고 추억이 되었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의 왜곡인가 내가 소설책을 읽은 것하고 혼돈을 느끼나 하고 의심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너무 어려울 때는 “유가 체험”이라는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엌 아궁이 앞에서 밥을 먹었던 일은 지금도 동서와 만나면 괴세기기 좋은 추억 꺼리 입니다.

지금은 명절 연휴에 호숫가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놀면 되지만 어렵고 생소한 시댁문화 때문에 힘든 시절도 있었습니다.

2 Comments

  1. 윤정연

    2017-10-08 at 17:30

    수니님의 글을 읽으니 무슨 사극을 한편 보는것같아요…제사는 나도 어릴때 지내보기도 했지만…그렇게 예의범절에 또 나이많은 하인에게 젊은사람도 하대를 했다니, 아주 아주 옛날 야담이것도 같아요…그래도 이겨냈으니 지난 예길로 남네요~~
    건강하세요~~^^

  2. 데레사

    2017-10-08 at 18:55

    나도 그랬어요.
    그래서 아이들 에게는 제사 안 물려 줄려고
    남들이 많이 하는식으로 없애고 합치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내 생전까지만이라고 못 박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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