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 친구들 남편은 이제 거의 은퇴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50년대 전후에 태어나 국가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 그 주역인 세대입니다. 자녀 양육이나 교육 심지어 집안 대소사까지도 아내에게 맡기고 오직 바깥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주 6일이 아니라 주 7일에 야근까지 하느라 집안에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평생 일만 하다가 은퇴를 하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남겨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낯선 곳에 버려진 느낌마저 든다고 합니다. 궁리 끝에 낮 동안 산엘 간다든가 공원 산책을 하는 정도이고 책을 좋아하는 분은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소일하는데 그것도 임시방편은 되지만 그걸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안에 머무는 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고 집안일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깥일이 없어졌으니 안에 일에 관심을 보여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친구네 집 풍경을 얘기해보겠습니다.
아내가 부엌에서 혼자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도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남편이 식사를 마치고 바삐 출근해야 하면 굳이 부르지 않겠지만 하루 종일 심심해하는 남편이 식탁에 관심하는 것이 좋겠기에
“여보 와서 숟가락이라도 좀 놓으세요.” 했답니다.
마지못해 주방으로 온 남편은
숟가락 통이 어디 있더라?
여보! 물 컵은 어디 있지? 이러니
앓느니 죽는다는 소리가 아내 입에서 절로 나오게 됩니다.
아내는 속이 터지지만 하나, 하나 가르쳐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몇 번 칭찬과 몇 번의 싫은 소리 끝에 아내가 부르기 전에 식탁 가까이에 온 남편이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숟가락 놔야 해?
이때 아내의 대답이 유순하지 못합니다.
숟가락이 있어야 밥을 먹을 거 아니에요?
물 컵도 놔야 해?
식사하면서 물 안 드셔도 되면 놓지 마세요.
그러다 싸움이 되는 겁니다.
왜 말을 그렇게 퉁명스럽게 하느냐
나한테 짜증을 내는 이유가 뭐냐?
당신이 지진아냐 매번 얘기하는데 왜 매번 모르느냐.
간단한 일 아니냐?
밥 먹으려면 숟가락 놔야 하고 물 컵도 필요하고….
주방 일에 대해서 지진아 수준의 남편을 대리고 입씨름을 하다가 남편도 아내도 지칩니다.
남편이 불리하다 싶으면
“여보 사랑해” 하면서 눙치려고 드는데 그 꼴도 뵈기 싫어서 짜증이 난다고 했습니다.
옛날 남자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것을 몹시 꺼렸는데 매스컴의 영향인지 많은 노력 끝에 “사랑해 “소리를 제법 쉽게 할 수는 있게 되었는데 이걸 또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타이밍에 하는 통에 구박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남편이 “돈 안 벌어 온다고 나를 구박하는 거냐?”
이렇게 나오면 일이 커지는데
“밥 얻어먹기 치사하다.”라는 등 엉뚱하게 자기비하감까지 겹쳐서
서로 삐치고 말을 안 하게 되었고 그러다 각방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내들이 바라는 것은 식사시간이 되어 아내가 식탁을 차리면, 남편은 숟가락이라도 놓고 물 컵이라도 챙기는 등 관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게 되는데 그때에도 남자의 일과 아내의 일이 구별되고 아내만 하루 종일 부엌에 매여 삼시 세 끼를 준비해 내야 한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남자들은 은퇴 후에 주방을 장악하기 위해 미리 요리학원을 다니는 분들도 있다고 하는데, 남자들의 부엌 적응 능력에 따라 은퇴 후 삶의 질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하는 은퇴 후엔 주방과 친하면 아내와의 관계가 유리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