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필요한 이성친구

독서

북클 멤버들은 상가에서 만나서도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클은 60대들로 구성되어 있고 독서와 글쓰기가 취미인 분들의 모임으로 상주가 그 독서클럽 멤버입니다. 나는 북클 모임의 구성원은 아니고 시작할 때부터 간여해 온 옵서버 정도라, 어쩌다 한번 참석합니다. 책은 물론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가 물 흐르듯 이어져서,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현학적인 분위기에 절로 매료됩니다. 이 독서클럽을 북클이라고 줄여서 말하는데 이성의 남녀들이 만나 7~8년을 이어왔고, 이만큼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없다며 서로 소중하게 여깁니다. 가끔 참석해 보면, 이 독서클럽 멤버들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만 기록해도 훌륭한 글이 나올 것 같아서 누군가 기록을 하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예순이 넘어도 문청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문학청년 들입니다.
 나는 영화를 모르기도 하고 잘 안 봐서 그들이 하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독서 실력으로는 감히 그모임에 낄 수 없습니다.

지인의 부친이 94세에 돌아가신 문상이라 상가 분위기가 그다지 무겁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평소에 못 만났던 지인이나 친척을 결혼식장이나 상가에서 만나는 일이 흔합니다. 서로 연락도 못하고 지내다가 우연히 상가나 결혼식장에서 만나면 좀 멋쩍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고양시에 사는 분을 상가에서 만났는데, 저번에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고 처음이라 우리는 상가에서 만나는 사이네?” 이러며 웃었습니다.

상주되는 분이 저녁식사 전이라 북클 멤버와 나와 같은 식탁에서 다리도 쉴 겸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북클 멤버 중 한 분이 유럽여행을 가려고 스케줄을 짠 지도를 보며 이야기를 합니다.
 프로방스에 가서 10일쯤 지내며 차를 렌트해서 주변을 돌아보고, 알프스에서는 어디에 숙소를 잡고 어느 곳을 돌아보고……. 하는 두 달 여행 스케줄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고생이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계획을 짜는 일이 즐겁다고 해서 우리 모두 동의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 종이 위의 지도를 손으로 짚어가며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자니, 저쪽에 모여 있던 5~6명의 남자들이 상주를 손짓해 부릅니다. 밥을 먹다 말고 상주가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엔 상주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식사를 마치고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상주는 무슨 일인가 해서 밥을 먹다 말고 친구들에게 다녀와서 우리를 보며 웃었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상주가 북클 멤버인 자기 친구에게
~ 재들이 너 뭐네.”
?”
네가 여자(!) 들하고 노느라고 자기들 본 척을 안 한다고 ……”
아까 눈으로 다 인사했구먼~”
제들이 네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지금은 중심에서 벗어나 뒤로 밀리는 나이지만, 그분들이 한때는 기업체 사장이었고 높은 공직에도 있었고 돈도 벌어봤고 명예도 있던 분들입니다. 이제는 거의 정년퇴직을 해서 시간이 많이 남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시간을 소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분들입니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끼리 만나기는 하지만 등산을 간다거나 당구를 치면서 보내는 것도 계속하니 지루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 명의 여자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분에게 살짝 질투가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는 개구리”라는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아버지가 길을 가는데 개구리가 말을 걸었습니다.
나는 마법에 걸린 공주랍니다. 내게 키스를 해주면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내가 사람이 되면 당신께 아내처럼 봉사를 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개구리를 잡아서 냉큼 주머니에 넣어버렸습니다.
들은 척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향해 또다시 개구리가 외쳤습니다.
내게 키스를 해 주면 예쁜 공주로 변신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 나이엔 아내나 공주보다 말하는 개구리가 더 필요해.”

나이 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입니다.
대화는 묘한 것이라서 과거 이야기를 계속하면 식상하고, 자녀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게 되면 자랑이 되거나, 아니면 비교되어 자기 비하감에 빠집니다.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요. 정치 얘기나 종교 이야기 끝에는 틀림없이 싸움이 나거나 감정을 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연예인 스캔들을 들먹일 나이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흉이 되고……. 그러니 책보다 좋은 소재가 없습니다.
수준에 맞는 독서모임은 오래 지속 가능하고 이야깃거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상대의 감정을 상하지 않고도 내 뜻을 피력할 수 있습니다.
늙어서는 독서모임이 답입니다.
지적인 탐구를 계속하면 치매도 예방됩니다.
더하여 말이 통하는 이성친구면 더 좋겠지요.

2 Comments

  1. 김수남

    2018-01-18 at 14:00

    네,언니! 지적인 탐구를 해 나가면서 만나는 친구들! 듣기만 해도 너무 좋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안녕하시지요? 새해에도 언니네 가족 분들 모두 더욱 건강하시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cecilia

    2018-01-24 at 06:34

    순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오늘 오랫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가 참나무님 방에 인사 드리러 갔는데 주르륵 달린 댓글들에 깜짝 놀랐습니다. 참나무님께서 돌아가셨다니…믿겨지지 않아서 자초지종을 듣고싶은 욕심에 순이님께 여쭙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는만큼 알려주실 수 있겠는지요. 늘 새색시같은 느낌을 주시던 그리고 부지런 하시던 분께서 갑작스럽게 가시다니요. 비록 블로그 인연이지만 놀란 마음이 다스려지지가 않는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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